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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쓴다는 것은 온전히 내가 쓰이는 것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4-05-27

쓴다는 것은 온전히 내가 쓰이는 것

삶을 빚어내는 소설 장인, 김인숙 소설가(신문방송학 82)



19세에 등단해 40년 동안 한 해도 쉬지 않고 소설을 쓴다는 것. 생각만 해도 그 창작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기도, 한편으로는 매 순간 겪는 창작의 고통 속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김인숙 동문은 그 긴 시간 동안 세상을 통찰하며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을 꿰뚫어 소설에 담고, 국내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며 문단에서 확고한 존재감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새로운 작품을 써내며, 쓰고 싶다. 매 작품마다 만족하지 않고 다음 작품을 기약하면서. 그래서 글쓰기는 그의 삶 자체이고, 그의 삶은 우리에게 읽고 싶은 한 편의 소설과 같다. 

 

 

꿈을 찾아온 캠퍼스, 방황을 써 내려간 시간 

“소설가가 꿈은 아니었어요.” 김인숙 동문에게 들은 의외의 말이다. 멈추지 않고 작품 활동을 펼쳐온 김인숙 동문이기에, 자연스레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되기를 열망했을 것 같았다. 특히나 전업작가로 산다는 것은, 아무리 원해도 독보적인 재능 없이는 할 수 없는 특별한 일로 여겨지니 더욱 그렇다.


“사실 방송국에서 일하는 것이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문예반 활동을 하며 백일장에서 간혹 입선을 했는데, 그래도 꽤 유명한 문예반이라서 혹시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도로 생각했었죠. 중학교 때 방송반 활동을 했는데 지금까지도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경험이었거든요. 5명이 전부인 아주 작은 방송반이었어요. 점심시간에 음악 좀 틀어주고 멘트 몇 마디 하는. 모두 아나운서도 해야 되고, PD도 해야 되고, 방송 작가도 해야 하는데 그게 좋았어요. 작은 방에 모여 기계를 만져가면서 창의적인 일을 해내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살아야겠다 결심을 했고, 무슨 까닭이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부터 우리 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가고 싶었어요.”


줄곧 목표했던 대학, 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생활은 그의 기대와는 좀 달랐다. 신문방송학과에 가면 방송하는 기술 같은 걸 배우겠거니 예상했는데, 어렵기만 한 이론부터 공부해야 했다. 민주화운동의 물결이 거셌던 캠퍼스의 분위기도 낯설기만 했다. 연세교육방송국(YBS)에도 지원했지만 탈락해 자신감마저 떨어졌다. 낭만적인 꿈을 좇아 입학했지만, 캠퍼스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적응이 어려웠어요. 또 80년대이기도 했고요. 당시에는 대학을 즐길 수 있는 시기도 아니었거든요. 모두 다 힘들었죠. 열심히 학생 운동을 하는 사람은 열심히 하느라 힘들었고, 하지 못한 사람은 죄책감, 부채감 때문에 힘들었어요. 화려한 친구들과 일찌감치부터 학생운동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저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했죠. 튀고 싶긴 한데 튈 방법을 못 찾겠고, 그러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혼자 있으면서 글을 계속 썼어요. 작가가 되기 위해서 썼다기보다는 심심풀이로 썼어요. 그냥, 내가 하지 못하는 온갖 일들을 원고지에 썼죠. 그렇게 쓰다 보니 신춘문예에 응모도 한번 해볼까 싶었어요.”

 



 

준비 없이 들어선 작가의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글쓰기 

호기심에 응모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김인숙 동문은 단번에 당선된다. 대학교 1학년, 아직 만으로 스물이 되기도 전인 나이였다.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김인숙 동문은 그러한 세상의 주목에 얼떨떨했다.


“어찌 보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일은 제 인생에서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일이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굉장히 이른 나이에 등단을 하잖아요. 장르나 매체도 다양하니 창구가 많아 더 그런 것 같고요. 저희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제가 당시 최연소 당선자였거든요. 뭔가 좀 준비된 상태에서 커리어를 시작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죠. 당시 작가는 좀 센 이미지였어요. 작가가 되자마자 전화를 받았는데 ‘김인숙 선생님이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게다가 그때 ‘연대 신방과’라고 하면 사람들이 다 미묘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소설 내용이 파격적이었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연대 신방과 여대생이 어린 나이에 화려하게 데뷔를 했다는, 작품보다는 그 외의 면에서 관심을 크게 받았어요. 그런 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죠. 주변에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제가 문과대를 다닌 것도 아니었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저를 신기하게 보고…. 그래서 좀 힘든 시기였던 것 같아요.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소화를 못한 채로 1년을 보내며 인생이 너무 달라졌죠. 그냥 취미로 쓰고자 했는데, 제 삶이 그냥 확 달라졌어요.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나서 학과 지도교수님께서는 당신의 방 한편에 책상 하나를 놓아주시고서 다른 데 정신 팔지 말고 와서 글 쓰라고 하셨죠. 그 시절에는 그게 싫었어요. 구속 당하는 것 같고. 저는 도망 다니곤 했죠. 하지만 되돌아보니 기억에 남아요. 조교도 아니고 일개 학부생에게 그런 배려를 해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절 많이 보살펴 주셨어요.”


그냥 그렇게, ‘작가가 되어버렸다’는 김인숙 동문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대학시절 내내 계속 글을 썼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썼다. 시간이 갈수록 글을 써서 사회적인 기여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학을 한다는 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삶이 아니라, 사회적인 삶인 듯 대했다. 학교와 집이 멀지 않은데도 방을 얻어 나왔고, 학교 수업을 듣고 오면 늦은 밤까지 소설을 썼다. 방황의 시절이었지만, 그는 문학을 단단히 붙잡고 기댔다.


“다른 일을 해 볼까 하는 생각도 못 했어요. 모든 예술 분야가 마찬가지일 테지만, 다음에는 더 나아질 것 같거든요. 한 편을 끝내고 나면 거기서 끝날 수가 없어요. 부끄러워서요. 그래서 항상 다음에는 지금보다 잘 쓸 수 있을 것 같죠. ‘이걸로 다 됐다’가 아니라 ‘이만하면 됐다’에서 끝내야 하는데 그게 안되니까 계속해서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 내 직업이 된 거죠. 반면, 운이 좋은 점도 있죠.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늘 주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실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좌절하는 경우가 더 많을 텐데,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아서 그다음을 계속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또 평가도 받고 하니까. 그럼 한 번 더 해봐야 되나, 하다 보니 어느새 40년이 넘었죠.” 

 




낯설게, 다시 나를 들여다보고 온전히 담아내기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김인숙 동문을 ‘소설 장인’으로 평가했다. 사실 이만큼 그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을 듯하다. 매번 더 나은 작품을 위해 멈출 수 없다는, 그의 작가로서의 고집스러운 작품 기준도 그렇지만, 창작의 매 과정도 그렇다. 무수히 많은 시도들을 통해 자신 속에서 분출되는 이야기를 온전히 작품에 담아낸다. 스스로가 빠져들지 않으면, 납득하지 못하면 완성하지 못한다. 작품 속에 자신을 온전히 들이부어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그는 그런 작가다.


“저는 설계하고 글을 쓰기보다는 일단 쓰기 시작하는 편이에요. 물론 아무것도 없이 쓰진 않지만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완벽하게 준비한 다음 쓰지는 않아요. 10 정도를 설계한 후 100을 쓰죠. 글쓰기를 집 짓는 것에 비유하자면 전 집을 지어보고 무너뜨리고를 반복해요. 집을 지어봐야 잘못 지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벽돌을 쌓아봐야 이 벽돌이 맞는지, 기울어지지는 않았는지 아는 사람이죠. 어찌 보면 낭비가 되게 많죠. 계속 돌아와서 다시 쓰고, 다시 쓰고 하니까. 시작은 잘 하는데 끝을 내기까지가 어렵죠.”


그렇게 내놓는 한 편 한 편은 온전히 자신이 빠져들어간 작품이니 자연스레 깊고, 울림이 크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은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에서 수상했고, 그가 쓰는 작품은 매번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다. 


소설가는 늘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 시작은 자기 자신에게 먼저다. 그만큼 김인숙 동문은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는 곳으로 떠나는 일을 좋아한다. 자신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며 작가로서 더 잘 질문하기 위해, 이방인이 되곤 한다.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이 작품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요. 30대에 호주와 중국에서 꽤 머물렀었어요. 강렬한 시간들이었죠. 존재 자체가 전복되는 느낌이었어요. 언어, 문화 어느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상처받기 일쑤였죠. 항상 자기 자리에서는 자기가 안 보이잖아요. 보여도 한계가 있죠. 완전히 동떨어진 나라에서 마치 내던져지듯 익숙하지 않은, 심지어 상처도 받죠. 그러면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라는 질문이 생기면서 당황하는 순간들이 오거든요.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으로 해외에 가서 몇 개월씩 머무르다 온 경험도 많아요. 그 낯선 시간들이 좋은 계기가 되어 매번 문학적 결과물로 남았어요. 호주 생활을 쓴 작품은 처음으로 문학상을 수상해 더 나은 커리어를 시작하게 했고, 중국에서 쓴 작품 <바다와 나비>는 이상문학상을 받았죠. 해외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할 수 있어서 좋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다시 바라보게 하고 익숙했던 경험들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생겨요. 좀 깨어난다고 할까요. 발리에서 쓴 소설 <빈집>은 한 부부의 이야기인데 여기 살았다면 그냥 어떤 평범한 측면만 보였을 텐데, 발리에서 썼더니 그 평범한 부부의 이면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도 했죠.” 


그는 ‘투어’로서 돌아다니는 여행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많이 보는 것보다 낯선 시공간에서 머무르며 자신을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함으로써 새로운 영감을 찾아내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

 


변화하는 삶, 새로워지는 작품 세계  

데뷔 시절부터 현재까지 발표한 작품들에 그의 삶이 투영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그가 온몸으로 겪어온 삶의 변화와 무게, 고민들이 그의 주제 의식을 변화시키고 확장시켰다. 그래서 그의 작품 세계나 작가로서의 정체성은 한마디로 규정되지 않는다. 


“삶 자체가 변화하니까요. 10대에 처음 작가가 됐을 때 그 시절의 관심사는 ‘사랑’이지 않나요? 사랑에 대해서 많이 썼죠. 20대에는 민주화 운동 시대에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회 문제를 썼죠. 30대에는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면서 구체적인 삶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거잖아요. 아이를 키우면서 겪게 되는 삶의 고단함, 그리고 결혼을 하면서 여성에 대한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밖에 없고요. 40대에 들어서면서는 아이들도 웬만큼 컸으니, 이제 다시 한번 내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죠. 50대에는 젊음과 늙음 사이의 경계에 있는 것 같아요. 40대에는 50이 되면 엄청 늙을 것 같은데 안 늙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미리 생각했던 늙음과 어떤 의미에서는 유지되고 있는 삶들, 그 사이에서 여러 가지를 보고, 듣고, 느끼면서 더 깊어지는 존재의 이야기들에 대해 자연스레 관심이 갔죠.”


변화의 흐름을 타다 보니 이제는 쓰고 싶어지는 이야기도, 해보고 싶은 장르도 다양해진다. 지난해 김인숙 동문은 <더 게임>이라는 추리소설을 선보였다. 5년 전부터 쓰기 시작했고, 3년 전 문학동네 웹진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한 작품을 다듬고 고쳐서 장편소설로 펴낸 것이다. 오랫동안 순수문학을 해 온 그가 장르 소설을 발표했다니 화제가 됐다. 하지만 워낙 예전부터 추리소설을 좋아했었고, 기존 작품들에서 추리 기법이 보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기에 본격 추리소설을 써보자는 출판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 순수문학 범주의 소설만 읽으면 너무 힘들잖아요. 또 다른 분위기와 관점, 다른 독서법을 추리 소설이 주는 것 같아요. 완전히 다른 저를, 다른 자리에 독자로 두게 해서 예전부터 굉장히 재밌게 읽었어요. 좋아하니까 기존 작품에서도 추리 기법이 반영됐겠죠. 다음 작품집은 김인숙 추리 소설전으로 나와요. 정말 대놓고요. (웃음)”

 

 


어떤 변화에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소설 

그가 소설 쓰는 일만큼 몰입하는 일은 책을 읽는 것이다. 소설가의 운명이기도 하다. 어느 특정 분야, 장르에 치우치지 않고. 골고루 좋아하려고 하고, 또 그것을 권한다. 그래서 세상의 온갖 책들이 모인 도서관은 그가 가장 ‘애정’하는 곳 중 하나다. 책이 가득 쌓여있는 그의 서재를 예상했지만 쌓아두면 찾기만 어렵다고.


“모든 책은 다 좋은 책이에요. 어떻게 순수문학만 읽겠어요? 웹소설이든 추리소설이든 골고루 먹다 보면 스스로 다이어트법이 생겨서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거든요. 그리고 다이어트를 하다 보면 하루쯤 치팅데이도 있잖아요. 그땐 또 자기에게 안 맞는 문학이라도 한 번쯤 맛봐도 괜찮겠죠. 책을 가까이할 수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다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특히 도서관을 좋아해요. 도서관에 가면 보고 싶은 책부터 시청각 자료까지 마음껏 볼 수 있잖아요. 한 번은 해외도서관에서 라틴어로 쓰인 책을 본 적이 있는데 제가 어떻게 읽겠어요? (웃음)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어요. 책 자체도 아름다우니까요. 읽지 않아도 그냥 책을 보면서 언젠가 읽겠지 하는 마음도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집에 있는 책 중에서 3분의 1은 읽지 않은 것들이에요.”


그렇다면 책을 쓰는 직업 작가이고, 책에 흠뻑 빠져 사는 김인숙 작가에게 요즘 소설이 처한 현실은 어떻게 다가올까. 각종 영상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시각자료에 더욱 익숙해져 가는 사람들. 글 읽기는 어렵기만 하다. 앞으로 소설이 설 자리는 있을까.


“사실 그림을 좋아해 갤러리를 찾아다니는 사람은 한정적이죠. 음악회를 가는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계속,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고요. 그 존재 이유가 꼭 대중들과의 접촉면이 넓어야 하는 건 아니죠. 계속해서 이전보다 설 자리가 좁아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독자들과 접점이 줄어든다고 해도 번져나가며 또 다른 영향력을 갖게 될 거예요. 영상물과 책은 어느 것이 지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아요. 그저 다른 위치에 있고, 그래서 서로 영향을 주기도 하죠. 그런 변화의 시기는 언제나 있어왔고요.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에 대해 우려하지만, 인공지능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 나올 수 있겠죠. 그렇게 변화를 받아들이고 소통하고 반영해야 해요. 그래서 저는 소설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언제나 지금이 마지막 작품인 것처럼

김인숙 동문은 소설이 세상의 어떤 변화에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앞으로 작가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만의 관점으로 사회와 시대를 통찰하고, 끊임없이 낯설게 보며 긴장한 채로. 지금껏 그래왔듯 소설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가면서 말이다.


“10년 전에 질문을 받았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거 같아요. ‘오래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요.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항상 지금이 마지막 책인 것처럼 쓰고 싶어요. 소설은 굉장한 노동이 필요해요. 육체적으로 힘들고 시간과 에너지도 많이 투여해야 하고, 마지막까지 기억의 집중력도 유지해야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오래 쓰시는 분들에 대한 존경과 감동은 언제나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저는 지금 쓸 수 있는 힘이 있고, 남은 계약이 있고, 그냥 가장 잘 쓰고 싶어요.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게 있고, 쓰고 싶은 게 있고, 그리고 그걸 잘 쓰려고 욕망한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또 계속 소설을 쓴다는 것은 기술적인 숙련도의 문제라기보다는 글이 계속 읽혀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려면 ‘긴장’이 있어야 하죠. 긴장은 세상과 소통하고, 계속 반응해야만 가능한 일이에요. (비록 늘 가능하진 않을지라도) 조금이라도 무뎌지지 않으려고 해요.”

 

<나는 어떻게 글을 쓰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 같은 이름의 책에서 김인숙 동문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어떻게 쓰는가. 내가 내 소설 속에 완전히 쓰인 후, 나를 읽는 독자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다. ‘나는 어떻게 쓰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쓰였는가’라고.”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는 읽히고 마음을 움직이길, 그래서 그가 더 잘 쓰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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