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발랄 상상력으로 세상에 던지는 질문
끊임없는 질문으로 울림을 전하는
김다민 영화감독(심리학/문화인류학 12)
모스부호, 페르시아어, 막걸리. 어린아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재들로 어린아이가 현실에 의문을 품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아낸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제목에서부터 톡톡 튀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재기발랄한 제목부터 관심을 끄는 이 영화는 짐작과 달리 치열한 제도권 입시,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친 어른들의 세상에 질문을 던진다. 영화계와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주목받고 있는 이 영화는 김다민 감독의 세상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이해의 폭을 넓힌 연세에서의 배움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에서 영상연출을 전공한 김다민 동문은 우리 대학교에서 심리학과 문화인류학을 전공했다. 워낙 확고한 꿈이 있는 친구들이 모인 고등학교인지라 대부분 영상연출 관련 학과로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김다민 동문은 좀 달랐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무척 자유로운 분위기였어요. 학년이 올라갈수록 실기 비중이 점점 커지다 보니 교과목 공부에선 멀어지게 돼요. 영화를 만드는 것은 그냥 일상적인 일이었죠. 대학교를 갈 즈음 공부를 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관련 학과로 진학을 하면 대학생이 되어서도 고등학생 때 했던 전공실기를 그대로 하게 될 것 같았어요. 그보다는 공부를 통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싶다는 생각이었죠. 마침 우리 대학교에서 기존 입시의 틀을 깬 창의인재전형을 모집했고, 수능점수와는 상관없이 다양한 재능과 뚜렷한 개성을 가진 학생들을 선발했어요. 제가 1기로 선발이 됐죠. 운이 좋았던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영상연출이 좋았던 만큼 사람에 대한 관심도 커서 심리학과를 선택했는데, 나중에 보니 제가 문화인류학에도 많은 흥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래서 복수 전공을 했죠.”
대학시절 가장 애정을 가지고 배움을 즐겼던 것은 지역 현장에 나가 직접 체험하고 질문하면서 지역만의 문화 생태계를 탐구하는 일이었다. 낯설게 보기, 새로운 접근법으로 표면적인 모습 뒤에 숨겨진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일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문화인류학에서 배운 시선은 어린 시절부터 만화와 영화를 즐겨보면서 가져왔던 상상력과 호기심을 더해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가는 김다민 동문에게 더없이 흥미로웠고 훗날 그의 작품 세계로도 이어지게 됐다.
영화 감독을 향해 가는 작고 큰, 꾸준한 발걸음
대학 시절 심리학과 문화인류학으로 배움의 폭을 넓혔지만 김다민 동문은 영화와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았다. 틈틈이 프로덕션 연출부에서 현장을 누비며 영상연출의 실무 경험을 쌓았다. 저예산 상업영화에 참여해 보기도 하고 뜻이 맞는 친구들을 모아 직접 독립영화를 만들어 보며 재미를 더했다.
“맡아보고 싶었던 일들을 현장에서 크고 작게 다 경험해 본 것 같아요. 전공 공부와 영화연출 양쪽을 오가는 것이 버겁기도 했지만 때로는 리프레시가 되면서 완급 조절이 가능해서 잘 맞았던 것 같고요. 졸업 후 더 큰 현장에서 배우는 기회도 늘어났죠.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호기심이 워낙 많기도 하고, 하고 싶은 일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시작해 보거든요. 고등학생 때부터 연출을 공부했다고 해도 사실 그때는 리그가 작잖아요. 대학에 진학하면서 많은 친구들이 현실을 깨닫게 돼요. 무수히 많은 작품 분야, 다양한 연령대의 감독님과 스태프 등 저도 좀 어려웠죠. 그래서 현장 실무 경험을 쌓으려고 노력했던 것이고요.”
하고 싶은 일을 추진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미래가 불투명하고 환경이 어려운 영화 분야에 미래를 걸기에는 두려움이 큰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김다민 감독은 꿈에 대한 방향성을 가지고 언제나 방법을 찾아갔다. 영화연출에서 각본, 소설 집필까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면서 창작을 통해 세상에 메시지를 전하는 방향성을 가지며 꿈에 다가섰다. 그의 명쾌한 대답이 이어진다.
“2월에 개봉한 첫 장편영화인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시나리오 작업을 완성하고 제작자를 많이 만났어요. 이 영화에 대한 투자를 유치하는 데 꽤 오래 걸렸죠. 미팅에 나가면 대체로 다른 것을 해보자는 제안이 많았어요. 그중 하나가 얼마 전 화제가 된 드라마 <살인자ㅇ난감>이에요. 제가 각본을 쓴 첫 드라마이기도 하죠. 드라마가 큰 사랑을 받긴 했지만 모든 장면이 다 제 의도대로 나온 건 아니에요. 작품 속에서 여성을 표현한 문법이라든가 몇몇 지점에선 아쉬움이 있긴 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뜨거운 호응을 얻은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이죠.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살인자ㅇ난감>을 쓰기 훨씬 전에 완성한 작품인데 먼저 소설로 완성을 하고 그다음에 시나리오 작업을 했어요. 소설은 완결점이 명확한 장르라 해보고 싶었고요. 투자를 받기까지 저도 불안이 없었다고는 못하지만 세상에 재미있는 것들이 많잖아요. 영화 제작이 미뤄지고 있는 와중에도 다양한 것을 즐기려고 노력했죠. 제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보다 실제는 덜 최악이었어요. 그래서 계속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가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덜고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데에는 학창 시절 입학처장이었던 김동노 교수의 조언도 한몫했다.
“입학처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창의인재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말씀하셨죠. 가는 길이 어쩌면 불확실한 미래이기도 하지만 연세라는 이름이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요. 무슨 꿈을 꾸고 어떠한 길을 가든 그 가려는 길에 장애가 되진 않을 것이라고, 오히려 연세 동문이라는 것이 뭔가를 더 해낼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도 있을 거라고요. 힘이 되었죠. 학교생활은 평범했어요. 학교와 영화계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동아리를 비롯한 비교과 활동에 관심을 쏟을 에너지는 없었어요. 제가 재학생 시절 가장 좋아했던 곳이 도서관이었어요. 다양한 분야의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책과 이벤트, 영화 DVD가 충분했죠. 심지어 필요한 자료를 신청하면 바로바로 구비해 주셨어요. 학교 도서관에서 지낸 시간들이 제 색깔을 찾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됐죠.”
<살인자ㅇ난감>이 흥행하면서 대중적인 호응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고,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도 확고해졌다.
“어쩌면 딜레마일 수도 있는데 자극적인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잖아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메시지는 선한 영향력을 미치길 바라요. 이런 경험들이 누적되면서 점점 하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사진 제공: 안나푸르나필름
제도권 교육의 현실 속, 방황하는 이들을 위한 질문
지난 2월 개봉한 독립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평단의 호평 속에서 미디어와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빡빡한 제도권 교육을 받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아이의 시각으로 던지는 질문, 그리고 그 답을 막걸리와의 대화를 통해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이 영화의 독특한 소재인 ‘막걸리’는 그가 배운 전통주 만들기 실습에서 출발했다.
“뭔가 새롭게 경험하는 것을 즐겨서 동네 평생학습관에서 막걸리 만들기 수업을 들었어요. 막걸리가 발효, 숙성되면서 기포 소리가 나고, 소리가 바뀌고 하는 과정들을 보면서 신기하기도 했고, 막걸리가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또 지나가다 학교 앞에 죽 늘어선 학원 버스를 보면서 의문을 가지게 됐어요. 배움이라는 것에 대해서요. 우리 삶은 늘 뭔가를 배우는 것의 연속이잖아요. 그런데 제도권 교육에서 하루 종일 빡빡한 학원 일정을 감내하며 가지는 목표가 대학 입시라면 너무 작잖아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분야를 선택해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지만 대학에 와 보니 빡빡한 제도권 교육을 받은 친구들이 대학 합격이라는 목표를 이뤘지만 방황을 하는 거예요. 대학만 바라보고 치열하게 공부했는데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시작됐어요. 뭔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 창의적으로 탐구해 보자 했죠. 그렇게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의 소재를 결합해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냈어요.”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사진 제공: 안나푸르나필름
주인공 동춘이의 ‘왜?’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영화는 이런 제도권 교육에 대한 물음을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던진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그 답을 찾는 일은 어렵다. 어느 어른에게도 명확한 답을 구하지 못하는 동춘이는 막걸리의 기포 소리를 모스부호로, 모스부호를 페르시아어로 해석하면서 답을 찾아가는 길을 발견한다. 동춘의 엄마도 선택의 갈림길에서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결국 이 영화는 입시지향의 교육 현실을 꼬집기도 하지만 이는 또한 어른들을 위한 질문이기도 하다.
“교육 현실에 관해 담는 콘텐츠들에서 엄마는 대부분 악당으로 많이 묘사가 돼요. 그러나 사회 문화적인 맥락에서 엄마도 역시 흔들리고 방황하는 거죠. 어찌 보면 아이가 커서 이 세상에 잘 적응하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잖아요. 그게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요. 학원을 줄여야 할까, 잠을 더 재워야 할까 선택해야 할 것들 투성이죠. 이 길이 아닌가 싶다가도 페르시아어 수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동춘을 보면 더 시켜야 할 것 같고. 엄마도 그 안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죠.”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사진 제공: 안나푸르나필름
질문을 놓지 않는 과정 자체가 삶의 의미를 더한다
그래서 김다민 동문은 걱정하지 않고, 방황하지 않고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두는 알고 있는 것일까. 아이의 입장에서 대학보다는 더 큰 목표가 납득이 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가장 질문이 많게 마련인 아이, 유일하게 계속 질문을 놓지 않는 동춘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영화의 메시지를 담기에 가장 설득력이 있었다.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동춘이가 인파를 헤치고 뛰어가는 장면은 김다민 감독이 가장 공을 들였다.
“학원가는 대부분 번화가라서 유흥가와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아요. 동춘이가 인파를 헤치고 처음에는 고등학생을 가로지르고 그다음에는 술 먹는 20-30대를, 그다음은 회식이 끝난 중장년층을 보면서 지나가요. 동춘이가 살아보진 않았지만 눈에 그려질 미래죠. 하지만 동춘이는 다른 길로 빗겨 나가요.”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있는 일에 늘 질문을 던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메시지는 울림이 크다. <막걸리가 알려줄거야>의 결말은 보는 이들이 각각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른 관객들은 새드 엔딩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지만, 동춘의 미소로 마무리된 이 영화는 해피 엔딩일까? 김다민 감독은 해피 엔딩이라 믿고 싶다.
<막걸리가 알려줄거야>에 대한 관객 반응도 호평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였을 때 상영을 앞두고 악몽을 꿀 만큼 긴장했지만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하는 이들의 입소문이 퍼져 최근 1만 관객을 돌파했다. 상업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관객수이지만 독립영화로서는 드물게 성공적인 사례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매진에 이어 ‘오로라 미디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재기발랄한 스타일로 안타까운 현실과 역설을 마주하게 하는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삶을 반추하게 만들며 사회적 화두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사실 영화의 표현이 조금 불친절하고 미숙해서 사람들이 이해를 잘 못할 거라는 걱정도 있었는데 관객들의 평이나 질문들을 들어보면 제작 의도 그대로 이해해 주신 분들이 많더라고요. 너무 감사했어요. 리뷰 모니터링에서도 자신의 경험 이야기와 함께 길게 리뷰를 써주는 분들도 많고요.”
더 많은 배움으로 그려갈 나만의 작품 세계
첫 장편영화와 첫 드라마, 연이은 작품을 성공적으로 마친 만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법도 하지만 김다민 동문은 여전히 배우고 싶은 것도, 해보고 싶은 것도 많다. 작년에 쓰던 대본 작품도 정리가 되어 가고 있고, 기다리는 작품도 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장르도 다 시도해 볼 예정이다. 스릴러와 블랙 코미디 등 전혀 다른 장르 간의 결합, 때론 양 극단을 오가는 작품을 꾸준히 보며 상상력과 영감을 채우는 일도 게을리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는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그가 만든 영화라는 것을 한 번에 알아챌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자신만의 단단한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것. 김다민 동문이 이 꿈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놓치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도 눈에 띈다. 한 아이의 질문이 귀에 들린다. “나는 재미있었는데, 엄마는?” 이 영화를 통해 아이들이 느낀 재미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아이들이 그간 품었던 질문을 동춘에게서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또 어떤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았을까. 김다민 동문의 메시지가 그 가족에게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전하지 않았을까.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결말은 새드 엔딩이 아니라, 해피 엔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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