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판매하는 곳에서 향유하는 공간으로
서점을 복합 문화 공간으로 만들다, 영풍문고 김경환 대표(전자공학 79)
지난 1월 개장한 스타필드 수원점 내 영풍문고는 기존 서점과는 다른 분위기와 매장 구성으로 큰 화제가 됐다. 특히 영풍문고가 새롭게 선보인 문구 편집숍 ‘애프터글로우(Afterglow)’는 이미 MZ 세대들 사이에서 ‘꼭 가봐야 할’ 명소로 손꼽힌다. 종이책을 읽는 사람들이 줄면서 서점의 위기를 말하는 시대, 다양한 시도를 통해 미래를 모색하고 있는 영풍문고에는 2022년 부임한 유통 전문가, 김경환 대표가 있다.
영풍문고의 부흥을 이끌다
김 대표의 부임 직전, 영풍문고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코로나라는 악재가 2년 이상 이어진 탓에 매출은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흔쾌히 대표직을 맡았다. 롯데마트에서 신사업본부장으로 일하며 다양한 품목의 상품을 취급했던 경험에 비춰, 책이라는 단일 품목 판매는 비교적 수월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신발 끈을 단단히 묶은 그는 취임 직후부터 지금까지,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쉬려고 노력했다’고 말할 만큼 영풍문고의 성장을 위해 쉼 없이 달려왔다.
덕분에 지난해 매출이 코로나 이전으로 완전히 회복된 것을 넘어, 월간 최대 매출을 달성하며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아울러 점포 업무를 모바일화해 대부분의 업무를 핸드폰만으로 처리하면서 직원들의 생산성도 20%나 향상됐다. 특히 모바일에 익숙한 요즘 신입 사원들은 30분의 교육만으로 바로 현장 투입이 가능해졌다.
오프라인 서점의 불황기에 이처럼 좋은 성적을 거둔 비결을 묻자, 그는 ‘문구 부문의 강화’와 ‘서적 매장 구성의 다양화’를 꼽았다.
“아무래도 책만으로는 차별화가 어려워 보였어요. 문구는 요즘 젊은 세대들의 취향이기도 하고, 오프라인 문구점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 착안했죠. 다양한 문구를 한곳에 모으니 사람들이 다시 서점을 찾기 시작하더라고요.”
‘문구를 영풍문고의 신성장 동력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는 ‘애프터글로우(Afterglow)’라는 문구 편집숍 브랜드 출시로 이어졌다. ‘애프터글로우’는 대형 서점에서 흔히 보는, 고급 필기구 위주의 문구 편집숍에서 탈피해 MZ 세대들에게 인기 있는 브랜드와 요즘 감성의 소품들로 매장을 채웠다. 감각적이고 트렌디한 제품이 가득한 매장은 입소문을 타고 젊은 고객들을 사로잡았다.
독립 출판사, 북 마스터, 생일 책 코너 등 매장 구성 다양화
부임 후 그는 스타필드 수원점을 포함해 세 개의 매장을 오픈했고, 두 개의 매장을 새롭게 단장했다. 새 매장들의 특징은 입구가 따로 없다는 점이다. 고객이 어디서든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통로에 면하는 부분은 모두 개방했다. 매장 어느 곳에 서 있든, 막힘없이 양쪽 끝이 모두 보이도록 설계한 것도 기존 매장과 다른 점이다.
책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향유’하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매장 구성에도 변화를 줬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숨은 보석’ 같은 소형·독립 출판사를 소개하는 코너를 별도로 운영하는가 하면, 문학·역사·경제 등 한 분야에 오래 근무한 직원을 ‘북 마스터’로 선정해 책을 추천하는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책은 많지만 정작 고르기가 쉽지 않아 막막함을 느끼는 독자들을 위한 배려다.
‘생일 책’ 코너도 눈에 띈다. 누군가의 생일에 책을 선물하고 싶을 때, 그와 같은 생일을 가진 작가의 작품을 추천받을 수 있다. 선물 포장까지 해 주는 데다, 독특한 것을 좋아하는 젊은 세대들의 취향과 맞물려 최근 매출이 두 배 이상 뛰어올랐다고 한다.
“고객에게 책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안하고, 새롭게 즐길 방법을 계속 찾아 나가고 있습니다. 덕분에 책 판매량이 꾸준히 늘고 있어요. 아동 서적 코너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화 감성의 인테리어에, 부모님들이 그 자리에서 책을 읽어 줄 수 있도록 아동 전용 소파도 놓았어요. 서점에 앉아 엄마, 아빠가 읽어 주는 동화책을 듣던 추억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책을 좋아하는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아울러 ‘영풍문고에 대한 인상도 선명하게 남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합니다(웃음).”
책을 매개로 새로운 공간 경험을 제안하다
그가 구상하는 영풍문고의 핵심은 ‘공간이 주는 경험과 가치’다. 오프라인 서점이 온라인과 차별화되는 강점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 그는 일본 츠타야 서점을 예로 들었다. 츠타야의 마스다 무네아키 대표는 ‘서점의 위기는 서적 그 자체를 판매하려는 데서 시작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 매장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고객 중심의 매장 구성 원칙에 따라 잡지, 단행본, 문고본 등으로 분류했던 기존의 배치를 음식과 요리, 디자인과 건축, 인문학·문학 등 주제별 분류 기준에 따라 진열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또한 고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안하고, 그것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편안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을 매장에 구현함으로써 오프라인 서점을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책을 매개로 꾸준히 신사업을 만들고, 빠르게 변신해 나가는 모습에서 배울 점이 많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성과도 잘 맞고요. 츠타야에서 선보인 ‘셰어 라운지’는 유료로 이용해야 하지만 쾌적하고 몰입도 높은 공간에서 개인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아요. 매장에 따라 피트니스 센터나 가구 매장이 함께 들어가 있고, 교외형 매장에는 어린이집이나 미용실이 있는 곳도 있어요. 서점과 생활 밀착형 점포가 함께하는 형태가 좋은 참고 자료가 됩니다.”
그는 작은 동네 서점에도 관심이 많다. 영풍문고 대표가 된 이후에는 새로운 장소에 가면 서점을 찾는 게 새로운 습관이 됐다. 저마다 독특한 개성으로 운영되는 동네 서점은 신선한 발상의 콘텐츠를 만날 수 있는 귀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대학교 생활디자인학과와도 협업한 영풍문고 리브랜딩 작업
보다 ‘젊은 분위기의 서점’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진행 중이다. 영풍문고의 주 고객은 30~50대 여성들이다. 기존 고객의 고령화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고객층의 유입이 꼭 필요했다.
하지만 1992년 문을 연 영풍문고는 그 오랜 역사를 상징하듯 ‘중후한 노신사’ 같은 이미지가 강했다. 실제로 한 대학과 진행한 마케팅 관련 프로젝트에서 ‘영풍문고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한 답 중 하나가 ‘동네 할아버지’였다. ‘친근하고 신뢰감이 들지만, 옛날 느낌’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신함을 잃어버리면 새로운 고객을 만들기 어렵다. 그가 브랜드를 재정비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다. 영풍문고는 현재 고객 인터뷰, 산학 협동, 외부 컨설팅 등을 통해 새로운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지난해 가을, 우리 대학교 생활디자인학과와 함께한 프로젝트도 그 일환이다. 학생들은 영풍문고의 브랜드 디자인 및 통합 커뮤니케이션을 주제로 한 학기 동안 협업하며, MZ 세대의 시각에서 새로운 브랜드 스토리에 맞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비교적 짧은 프로젝트였지만, 참고할 만한 내용이 너무 많았어요. 여기서 나온 결과를 바탕으로 올해 본격적인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모교 후배들과의 협업이 저희에게도 도움이 됐지만, 후배들에게도 기업의 실질적인 운영 실무를 접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됐기를 바랍니다.”
대학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한 YCC(연세 컴퓨터 클럽) 활동
전자공학과 79학번인 그는 격동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캠퍼스에서 경험한 세대다. 대학교 1학년 때 10.26 사태가 발발했고, 2학년 때는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2학년 때는 학교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IT 기술도 빠르게 발전했다. 일례로, 그가 신입생이던 시절에는 컴퓨터를 사용할 때 펀치 카드를 사용했다. 초창기 저장 매체인 펀치 카드는 데이터를 표현하기 위해 규칙에 따라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을 뚫는다. 타자수와 같은 개념으로 펀치 카드기를 위한 ‘키펀처’라는 직업이 따로 있을 정도였지만, 이듬해 새로운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PC를 샀어요. 당시만 해도 8비트 컴퓨터 시대였고, 대중화되기 전이라 학과 안에서도 컴퓨터를 가진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또, 당시 전자공학은 통신 위주로 가르쳤어요. 컴퓨터에 대한 관심으로 전자공학과에 왔는데, 생각보다 컴퓨터를 많이 다루지 않으니 학과 공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죠. 대신 YCC(연세 컴퓨터 클럽)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갈증을 풀었어요. 같은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이 모인 곳이라 만나면 늘 즐거웠고, 지금도 학교를 떠올리면 동아리방에서 지냈던 시간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YCC를 통해 일찍 첨단 기술을 접했고, 덕분에 취업과 진로 선택에도 도움이 많이 됐어요.”
한국, 일본, 미국을 누비며 IT, 컨설팅, 유통 전문가로 성장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은행 주재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4년간 생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역무원이 창구에서 직접 표를 팔던 시절, 자동 발권기와 음료 자판기 등이 일반화돼 있을 정도로 이미 자동화 기기 시대로 진입한 일본은 그에게 ‘신세계’였다. 신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 김경환’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신기술에 대한 호기심은 대학 입학 때 당시 신학문이던 전자공학과 선택으로 이어졌다.
학부 졸업 후 그는 1984년 LG전자에 입사했다. 이후 한국 IBM, 일본 IBM을 거쳐 글로벌 컨설팅 기업인 액센츄어 서울사무소에서 유통 산업 담당 전무를, 롯데마트에서 SCM(공급망 관리) 부문장 및 신사업본부장을 지냈다. 롯데마트 퇴사 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물류 및 BPO(Business Process Outsourcing) 서비스 업체에서 일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여행 스타트업에 참여했다.
“미국에서 생활할 때 여행을 정말 많이 다녔어요. 여행이 새로운 취미가 됐고 관심도 많은 상태에서 여행 스타트업 창업 멤버로 참여할 기회가 생겼죠. 외국 자유 여행객을 대상으로 현지에서의 체험 활동 티켓 구매나 이동 수단 예매 등을 편리하게 할 수 있는 앱을 개발하는 회사였어요. 준비를 마치고 막 오픈하려는 시점에서 코로나가 터져,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해 많이 아쉬웠죠. 그 후 영풍문고로 오면서 본업인 유통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일본·미국 기업에서 IT, 컨설팅, 유통 등 다양하게 경험하고 배운 것들을 총체적으로 구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돼 무척 기뻤어요.”
유창한 일본어·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한 글로벌한 삶
그의 삶의 여정을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로벌’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스스로는 ‘역마살’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는 유창한 일본어·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세 나라를 누비며 유통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일본어 실력은 거주 경험에서 나왔고, 영어는 고등학교 때 당시 주한 미군 방송이던 ‘AFKN’을 통해 익혔다고 한다. 공부 목적이 아니라, 재미있어서 듣기 시작한 것이 쌓여 IBM 입사 때 빛을 발했다.
“IBM에 입사하니 신입 사원 교육을 싱가포르에서 하더라고요. 자기소개를 영어로 해야 하는데, 걱정돼서 일주일 동안 잠을 설쳤어요.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 앞사람들이 하는 걸 들어 보니까, 그 내용들을 조합해서 하면 되겠더라고요. 그날 이전까지는 아주 과묵한 사람으로 통했는데(웃음), 그 이후 말문이 트였어요. 외국어를 말하는 데는 자신감도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또, 외국어를 한 가지 배우고 나면, 다른 외국어 배우기가 상대적으로 쉬워요.”
IT, 유통 등 가장 변화에 민감한 분야에서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는 남다른 노력과 열정을 기울였다. 그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기회가 주어졌고, 운도 따라준 덕분’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 기회를 알아보고 놓치지 않은 것은 분명 그의 실력이다.
“인생을 돌아보니 잘 살았다기보다 잘 버텼다는 생각이 드네요(웃음). 한국에서 많이 지쳐 있을 때, 미국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고 틈날 때마다 여행을 다니며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때 얻은 에너지로 다시 또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그런 시간은 꼭 필요해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동안의 여행 경험을 콘텐츠로 만드는 일을 해 보고 싶다는 김경환 대표. 여행을 좋아하지만 짬을 내기 쉽지 않은 요즘은 지방 매장을 살피러 간 김에 잠시 그 지역을 둘러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좋아하는 일도 잠시 유예할 정도로 지금 그는 영풍문고의 성장과 발전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일본 츠타야 서점처럼, 영풍문고가 우리나라 대형 서점의 미래가 될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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