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주의 광대한 공간과 장구한 시간 앞에서, 천문우주학은 어떤 질문을 할까?
천문우주학과 윤석진 교수
들어가는 말
“그래, 무악 위에 건설해야겠어.”
연희전문의 설립자 언더우드 박사께서는 1915년 교지(校地)의 청사진을 제작하며,
연희동산 무악에 늠름히 선 천문대를 꿈꾸었다[그림].
조선에 근대 과학을 효과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구상한 것이 천문대였다.
그러나 그의 건강악화로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언더우드 박사는 이듬해인 1916년 소천하셨다.)
일제(日帝) 총독부가 천문학 등 수물과(數物科) 강의를 줄이라는 압력을 가해,
1917년 천문학자 루퍼스 교수까지 도미(渡美)함에 따라
천문대 건설은 요원해졌다(*).
(* 신과대학 기독교문화연구소 최재건 박사의 자문에 의함.)
지난 3월 9일, 유성우가 내리더니 난데없이 한반도에 운석이 떨어졌다.
돌덩이 하나에 얼마니 하는 것이 일단 세간의 관심을 끌었고,
덕분에 과학에 관심이 없던 이들도 고급상식 하나를 챙겼다.
즉, 원시지구를 강타했던 대규모 운석 폭격이
오늘의 지구환경을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
같은 달 18일, 하버드대 천문학자들이 빅뱅의 증거를 찾았다는 외신이 날아들었다.
무뎌진 상상력을 자극하는 청량(淸凉)한 뉴스였다.
또,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National Geographic Channel)이 올해 선보인
한 천문 다큐멘터리(“Cosmos: A Spacetime Odyssey”)는
전세계 180개 국에서 17억 명이 시청했단다.
국내의 소위 ‘우주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단연 최고의 화젯거리다.
올 초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문어형이 아닌) 미남 외계인이 미녀 지구인을 만나,
은하수를 건너는 견우와 직녀의 사랑에 견줄 만한 우주적 로맨스를 펼쳤다.
그런가 하면, 모 기업이 스마트폰의 이름을 Galaxy(은하)라고 붙이는 바람에
두 명 중 한 명꼴로 은하를 손에 쥐고 산다.
바야흐로 “우주”가 우리의 (즉 지구인의) 일상에 깊숙이 파고든 시대이다.
대우주(大宇宙)와 천문우주학
지난 8월호 <연세소식> Academia 난(欄)에
영문학과 윤혜준 교수께서 인문학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필자는 이번 호에서 천문학을 소재로 말씀드리려 한다.
동양에서 천문학은 원래 天文, 즉 人文과 대별되는 개념으로,
인간"이" 만든 쿨투라(Cultura)가 아니라
인간"을" 만든 나투라(Natura)를 탐구하는 자연과학 자체를 의미한다.
자연과학의 아버지인 천문학은
(현대의 다기화된 학술분류상으로는) 자연과학의 한 부분으로서
우주 자체와 그 안의 천체(天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체계를 지칭한다.
인문학의 목적이 인간성의 회복과 인격의 고양이라면,
천문학의 목적은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찾고 우주관을 세우는 것이다.
고대와 중세의 천문학이 주로 우주 안의 개별적인 천체를 다루었다면
현대 천문학은 우주 자체를 탐구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따라서 최근에는 천문학의 고전적 이미지를 탈각하는 효과까지 있는
“천문우주학”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대우주의 시원(始原)과 역사,
또 그 속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에 관한 궁금증은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근원적 질문이다.
이러한 본원적 호기심에 가장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학문이 ‘천문우주학’이다.
고작 1,500g인 인간의 두뇌로 인류 지성의 최대 화두인 대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천문우주학은 무슨 생각에 천착하고 어떤 질문을 하는가?
Q. 대우주는 언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왜 대우주는 (없지 않고) 있을까?
우주의 존재 목적에 관한 이 질문은 인문학에 맡긴다.
그러면, 어떻게 대우주는 존재하게 되었을까?
천문우주학자들이 오랜 연구 끝에 도달한 곳은 “빅뱅(Big Bang) 우주론”이었다.
우주를 존재하게 만든 사건이 “빅뱅”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부터 시공간(時空間)이 ‘시작’되었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우주가 없으면 시간도 없다.
(우주는 시간 “안”에서가 아니라 시간과 “함께” 만들어진 것이다.)
우주에 ‘시작’이 있었다.
이는 지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적 발견이다!
빅뱅의 관측적 증거를 찾았다는 지난 3월 외신을 다시 언급하자면,
이 증거는 더 구체적으로는 (빅뱅의 증거라기보다는)
빅뱅 직후 ‘급팽창(inflation)’의 증거이다.
빅뱅의 간접적 증거인 셈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빅뱅의 직접적 증거 중, 네 가지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주의 팽창이다.
1929년 에드윈 허블은 우리은하(Milky Way Galaxy) 근처의 은하들 대부분이
우리은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는 은하들이 얹혀있는 우주공간 자체가 팽창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공간이 팽창할 때, 모든 은하들은 서로로부터 멀어지는 운동을 하게 된다.
더 멀리 떨어진 은하일수록 더 빨리 멀어진다.
허블이 발견한 이 법칙(은하들의 거리와 후퇴속도와의 관계)은
허블 당시에 비해 1만 배 넓은 우주공간에서 연구되고 확증되었다.
은하들의 후퇴운동, 즉 우주의 팽창이 가지고 있는 함의는 실로 심대하다.
바로, 우주가 그 언젠가 한 점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그 시점을 “태초”라고 부를 수 있겠다.)
시작점, 즉 빅뱅이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우주의 잔열이다.
만일 빅뱅이 있었다면 태초의 우주는 매우 작았을 것이고,
작은 우주는 엄청난 고온의 상태였을 것이다.
이제 우주가 팽창함에 따라 온도가 떨어진다.
우리는 손이 시릴 때 입을 벌려 손에 ‘호호’ 분다.
뜨거운 냄비를 만졌을 때 입술을 오므려 손에 ‘후’ 분다.
똑같은 입 속 공기인데 왜 온도가 다를까?
입 안의 공기를 ‘후’ 하고 세게 내뱉으면
공기가 갑자기 팽창하며 온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우주가 팽창하면서 온도가 떨어지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그렇다면, 우주 전체에 걸쳐 고르게 퍼져있는 낮은 온도의 잔열(殘熱)이 있어야한 다.
1967년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윌슨은 이 우주 잔열을 최초로 발견하였다.
(그리고 1978년 노벨상을 받았다. 이 잔열을 “우주배경복사”라 한다.)
우주 나이 약 38만 살 당시(현재 우주 나이의 십만 분의 일이 지난 시점),
우주가 지금 크기의 1/000이고 온도가 3000도일 때의 열이
현재 우주 전체에 낮은 온도(영하 270도!)로 퍼져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두 손으로 빈주먹을 쥐어보자.
그 안에 초기 우주의 잔열 광자(光子, photon)가 500개쯤 들어있다!
(물론 보이지는 않는다.)
셋째, 우주의 헬륨량이다.
헬륨은 (액화시켜) 고급 냉각제로 쓰이고,
장난스런 도날드덕 목소리를 만드는 데도 사용된다.
이런 흔한 헬륨과 우주탄생이 어떻게 연관될까?
빅뱅 직후 가장 먼저 생성된 원소는
가장 간단한 원소(양성자 하나, 전자 하나로 구성)인 수소이다.
그러나 현재 우주의 원소들 중에는 헬륨이 25%(질량비) 존재한다.
헬륨은 보통 항성(恒星) 내부의 높은 온도/압력에 의해
수소를 헬륨으로 바꾸는 핵융합에 의해 만들어 진다.
태양이 지난 46억 년 동안 지구에 한결같은 에너지를 보내준 것도
태양 내부의 핵융합 덕분이다.
그러나 우주 원소의 25%에 해당하는 이런 막대한 양의 헬륨은
(아무리 우주에 항성들이 많더라도) 항성의 핵융합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한 것도 역시 빅뱅 이론이었다.
빅뱅 당시의 높은 온도/압력에 의해
우주 전체가 하나의 헬륨 공장인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론에 의하면, 빅뱅 핵융합은 태초에 단지 1000초, 약 17분간만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헬륨의 높은 함량은 빅뱅의 강력한 증거이다.
끝으로, 빅뱅의 또 하나의 증거는 은하 나이의 상한선이다.
은하들의 나이를 측정하는 방법론이 개발된 1980년대부터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은하의 나이와 가까운 은하들의 나이는 약 130억 살에 수렴한다.
예를 들어, 30억 광년 떨어진 은하들(30억 년 전 그 은하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중
가장 고령의 은하는 약 100억 살이다.
100억 광년 떨어진 은하들 중 가장 고령의 은하는 약 30억 살이다.
가까이 있는 은하든 멀리 있는 은하든,
은하 나이의 상한선인 130억 살을 넘지 않는 것이다.
빅뱅, 즉 시작점이 있는 우주는 유한한 나이를 갖는다.
그 안에서 생성된 은하들도 당연히 유한한 나이를 가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은하 나이의 상한선은 빅뱅을 지지한다.
그렇다면, 빅뱅은 언제 있었을까? 태초는 언제였을까?
위에 설명한 빅뱅의 증거들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빅뱅은 지금부터 약 137억 년 전에 일어났다.
우주의 나이 137억 살은 (46억 살인) 태양과 지구 나이의 거의 정확히 3배이다.
즉, 우주의 시간 2/3가 지났을 때 태양과 지구가 탄생한 것이다.
인간이 100년을 산다고 보면,
인간 수명은 현재 우주 나이의 약 1억 4천만 분의 1인 찰나에 불과하다.
137억 년은 인류에게 유의미한 “가장 큰 시간량”이다.
아직 궁금한 게 있다.
그럼, 태초에 빅뱅을 발생시킨 힘은 뭘까?
이 질문에 대한 확정적인 답을 아직은 찾지 못했다.
다만, 우주 기원에 대해 최근 유행하는 이론은 “양자상대론적 우주생성론”이다.
우주가 무한히 작은 점(원자보다 작은 크기)에서 시작되므로
우주가 "없다가 있게 되는" 물리적 원인을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인) 양자론과
(힘을 지배하는 법칙인) 상대론이 통합된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양자상대론적 우주생성론은 빅뱅의 원인을 양자적 상태에서 찾는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이 이론에 의하면 무(無)의 세계에 있던 양자적 진공 에너지의 무수히 많은 요동 중 하나가
유(有)의 세계로 비집고 들어와 우주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우주관은 우리 우주 말고도 무수히 많은 다른 우주를 예측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하던 Universe에서 “Uni-”라는 접두어가 ‘하나’를 뜻하므로
최근에는 Multiverse(다중우주)란 용어가 쓰이기도 한다.
과학이론은 관측/실험으로 검증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양자상대론적 우주생성론과 그에서 파생한 다중우주론은
관측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현재 없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즉, 직관과 수식으로만 존재하는 이론이다.
글_윤석진 교수(천문우주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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