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통해 미래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다
공일스튜디오(0_1studio) 대표, 조재원 건축가(건축공학 89)를 만나다
공간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건축가
담쟁이넝쿨이 붉은 벽돌을 멋스러이 감싸 안아 대학로의 랜드마크로 꼽히던 샘터 사옥은 혜화역 2번 출구에서 막 나온 사람들이 잠시 서서 숨을 돌리거나 젊은이들이 공연을 보기 전 만남의 장소로 삼은 열린 공간으로 기능했다. 대학로의 예술 문화와 고(故) 김수근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건축사적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이 공간은 2018년 레노베이션을 거쳐 ‘공공(共共)일호’라는 새 이름을 달았다.
여러모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이 프로젝트의 설계를 담당했던 조재원 대표(건축공학 89)의 목표는 분명했다. ‘옛 건물을 혁신적인 기능을 가진 플랫폼으로 바꾸겠다.’는 아이디어로 원형의 비전에 건축가의 상상력을 더한 것이다. 공공에 자리를 내어주며 지역 사회 문화와 상생하는 것을 꿈꾸던 김수근 건축가의 비전이 조재원 대표의 혁신적 상상력, 섬세하고 꼼꼼한 복원력과 만나 미래의 가치를 창출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건축을 설계한다는 것은 건축 공간이 담고 있는 이야기와 소통한다는 것’이라는 조 대표의 믿음이 또 한 번 증명됐다.
조 대표는 공간이 지닌 사회적 가치에 관심이 많다. 2016년 ‘상생과 협업을 공간이 추구하는 가치와 규범으로 삼겠다.’며 설계한 ‘카우앤독’은 서울시 건축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오늘날 범람하는 공유오피스의 시초로 불리고 있다. 언론에 칼럼을 연재하거나 오픈 강연을 통해 일반인들의 공간과 삶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 역시 건축가로서 그가 실천하는 사회적 역할이다. 건축 설계란 곧 건축 공간이 담고 있는 삶의 모습과 소통하는 것이라는 그의 신념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건축가가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물이 다르게 나올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 대지의 상태, 건축주가 요구하는 사회적 프로그램, 공간 사용에 대한 사용자들의 요구사항, 그리고 공간이 도시와 맺는 영향과 지속가능성 등을 정의한 뒤 건축주에게 건축물의 잠재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공간이 담는 역할에 대해 건축주에게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편이지요.”
조 대표는 자신이 질문의 세트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모든 프로젝트에서 성과를 내려 하기보다는 새롭게 정의가 필요한 프로젝트를 필요로 하는 건축주와 만날 때 건축가로서 진정한 정체성을 느낀다.
텍스트 너머의 학문에 눈뜨다
조 대표는 재수 생활을 거치며 사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학업 성과가 좋았던 그에게 대학에 낙방한 경험은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쳤다.
“나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자각하게 되더라고요. 지금까지의 나는 성적 하나로 과대평가되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학업의 잣대가 없는 사회적인 존재로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고민하게 됐지요.”
이과였지만 사회 문제와 관련된 전공을 택하고 싶다는 고민을 하던 즈음에 예전에 읽었던 김수근 건축가에 대한 글이 떠올랐다.
“김수근 선생님의 건축과 삶에 관한 기사였는데, 그분이 자신의 60~70년 이후를 상상하고 계획하며 살았다는 내용을 보면서 ‘아, 건축가는 현실뿐 아니라 긴 미래를 보는 사람이구나.’라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건축이란 일은 왠지 사회적 실천을 할 수 있는 학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건축공학을 선택하게 됐어요.”
학과 특성상 캠퍼스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유난히 많았다. 워낙 설계에 시간을 많이 쓰게 되니 선후배 및 동기들과 같이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아 관계의 밀도 역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동기 80명 중 여학우가 15명이었는데 워낙 개성들이 넘쳤거든요. 학교생활이 굉장히 즐거웠고 경험의 폭도 넓어졌지요.”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지라 자연스레 학과 내 동아리인 ‘건축과 사회’ 활동을 통해 건축의 사회적 역할이나 예술사 등에 관한 서적을 읽고 토론했다. 당시 학문의 주된 분위기는 텍스트를 강독하며 하나하나 독해하는 것이었고 조 대표 역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배움에 매진했다. 그런 그에게 전환점을 가져다준 것은 문화인류학 수업이었다.
“김찬호 교수님의 수업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내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 내가 봐야 할 텍스트고, 거기서부터 학문이 시작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어요.”
설계 실습으로 며칠 밤을 새우더라도 그 수업은 빠지지 않고 열심히 들어갔다. 학기 마지막 날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대강의였는데 교수님께서 수강생들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다 악수를 하셨어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중요하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고 느꼈지요.”
조한혜정 교수의 ‘글 읽기와 삶 읽기’ 책을 읽으면서는 학문을 대하는 관점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열심히 읽으면서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됐던 글들이 있었는데 그 글들이 내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을 자각하게 됐지요. 학문이란 잠재력과 가능성을 찾는 과정이라는 것을 선생님 글을 통해 알게 됐어요.”
독점과 경쟁에서 벗어나 다변화된 선택지의 주체로
폭증하는 부동산 시세로 온 사회 구성원들의 집에 대한 불안이 급증하고 있다. ‘건물주’가 선망하는 직업군이 될 정도로 공간을 재산이나 차익 실현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조 대표는 먼저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는 무엇인지 질문하고 그에 따른 삶의 형태를 상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는 사람들이 오직 차익 실현을 위해, 자기만의 독점적 삶을 위해서만 부동산에 뛰어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두려운 거지요. 아, 이 판에 뛰어들지 않으면 나중에 나 혼자만 한 평의 땅도 갖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요.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충분히 열어놓고 양보하고 상생하며 협업하려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회 구성원들이 더 많다고 믿습니다.”
그는 전문가로서 좋은 의지를 가진 자본의 출처와 닿아 새로운 타입의 삶의 모습을 선보이는 작업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
팬데믹 상황은 주거에 대한 고민과 상상의 실현에 가속을 붙였다. 내용이 아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공간이 플랫폼으로서 갖는 의미가 더욱 커진 것이다. 조 대표는 사람들이 전문가의 해법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스스로 주거와 삶의 모습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공간에 대한 새로운 패턴은 이미 시작됐어요. 내가 사회에서 관계를 맺고 존재감을 갖기 위해, 그리고 내 일과 내 삶을 균형있게 이뤄가는 장소를 구축하기 위해 꼭 비싼 곳에 비싼 부동산을 취득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지요.”
조 대표는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 당장 선택 가능한 조건에 집중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근무지가 주거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서울이나 대도시에 기대는 삶을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지요. 도시에 살아야만 한다면 자차를 갖는 대신 공유차량 서비스를 선택할 수도 있고요.”
그러나 선택의 여지조차 주어지지 않은 사회 구성원들을 위한 공동의 노력 역시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도심에만 존재하는 제한적인 일자리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도심 밖에서 살라는 건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반면 선택의 여지가 있는 분들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그분들의 실천이 다른 구성원들에게는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움직임들이 이미 사회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모든 시민에게 공통의 현관을
캠퍼스 중 가장 의미있는 공간으로 백양로를 꼽은 조 대표. 그는 우리 사회에 백양로와 같은 공간이 더 많이 주어지기를 꿈꾼다.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앞으로 쭉 뻗은 백양로를 맞닥뜨리면 여기가 ‘모두의 현관’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캠퍼스라는 공간은 하나의 도시 같은 곳이잖아요. 제각기 다른 데서 모인 모든 구성원들이 통과하는 공통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큰 소속감을 주지요. 그 소속감이야말로 사람들은 모여 사는 이유고요. ‘아, 내가 이곳의 일원이야.’라고 자신감을 주는 뿌리 같은 공간. 백양로는 연세인 개개인에게 기댈 만한 환경을 주지 않았나 싶어요.”
모든 시민들이 저마다 기댈 수 있는 공통의 현관을 갖는 것, 건축가 조재원 대표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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