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의 흔적이 영원히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연말, 85세의 정한석 씨가 납북된 동생을 그리는 가슴 아프고도 감동적인 사연을 담아 1억원을 우리대학교에 기부했다. 정 씨는 우리대학교를 졸업한 동문은 아니지만 우리대학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우리대학교는 6.25 때 납북된 동생 정용석 씨가 잠시 몸을 담았던 모교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생사도 알 수 없는 동생이지만 정한석 씨는 이렇게라도 동생을 기억하고자 화공생명공학과에 선뜻 발전기금 1억원을 기부했다. 지난 1월 12일 애틋한 형제애로 60여 년간 아우를 그리워한 정한석 씨를 만났다. 아끼는 동생, 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납북 3남 2녀 중 장남인 정한석 씨는 어릴 적부터 동생 용석 씨를 유난히 아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정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 은행에 취직해야 했지만 동생 용석 씨만큼은 공부를 시키고 싶어 동생 뒷바라지를 했었다. 정한석 씨는 눈물을 그렁거리며 동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동생은 유난히 제 이야기를 잘 따르고 착한 아이었습니다. 공부를 좋아한 녀석이었어요. 아직도 미분적분 공부하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공부를 해나가면서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동생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마침내 동생 용석 씨는 1950년 6월 10일 우리대학교 공업화학과(현 화공생명공학과)에 입학했다. 정한석 씨는 아끼던 양복을 전당포에 맡기며 기쁜 마음으로 동생의 등록금을 마련했다. “내가 하지 못하던 공부를 계속해 대학에 입학한 동생이 자랑스럽기만 했습니다. 제가 입학 선물로 손수 가죽 가방을 동생에게 선물 했습니다.” 그러나 정한석 씨의 기쁨은 얼마 오래가지 않았다. 보름 후 발발한 6·25 때문에 정 씨가 서울을 떠나 피란을 간 사이 서울 삼선교 소재 집에 남아 있었던 동생 용석 씨는 북한에 납북됐다. 정 씨는 동생과 함께 집에 남아 있던 어머니의 말을 빌려 그때 상황을 전한다. “당시 인민군이 후퇴해 청년들을 모두 끌고 간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집 다락방에 숨어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한 여성이 인민군과 함께 찾아와 숨어 있던 동생을 끌고 갔다고 합니다. 그게 가족들이 용석이를 본 마지막 이었습니다.” 노트, 입학증명서, 등록금 영수증 등 동생의 흔적 고스란히 정한석 씨의 어머니는 그렇게 끌려간 용석 씨를 찾기 위해 서울 이곳저곳을 다녔다. 어머니는 일신국민학교(서울 필동)에 끌려간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는 동네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단숨에 그곳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어머니가 찾은 건 찢어진 옷 조각들뿐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흘러가는 이야기로 인천, 동두천 등에 납북된 청년들이 모여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는 하였지만 동생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가족들은 용석 씨의 행적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부질없었다. 그렇게 찾기를 포기한 동생이지만 아직도 정 씨는 동생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도 동생 용석 씨가 필기한 책과 공책이며 대학 입학증명서, 등록금 영수증까지 모두 새것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는 이제 동생을 잊고 살아가야 한다며 동생의 물건을 태우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죠. 어머니가 아이의 배냇저고리를 간직하듯이, 동생의 책이며 공책, 제가 사준 가방까지 소중히 가지고 있었죠. 혹시라도 다른 가족이 보면 가슴 아파할까봐 한밤중에만 몰래 혼자 꺼내어 보았습니다.” 남은 동생들과 자녀들의 학업 뒷받침하며 마음달래 정 씨는 남은 세 명의 동생과 그의 네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것으로 용석 씨를 떠나보낸 한을 달랬다. 정 씨의 여동생 또한 우리대학교 간호학과에 입학해 오빠 용석 씨를 대신해 학업을 이어 갔다. 그러나 정 씨는 여동생의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는 연세대학교 앞을 지날 때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동생 용석이 생각으로요. 아직도 여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곁에 없는 용석이 생각에 여동생의 졸업식을 갈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여동생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또한 우리대학교에서 동생 용석 씨의 뒤를 잊고 있다. 그의 아들은 법학전문대학원 정영철 교수로 지난 2007년 우리대학교에 부임하여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대학교와의 이런 인연 때문에 정한석 씨는 마지막으로 동생을 위해 1억원을 선뜻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그토록 수학하고파했던 모교에 동생 흔적 남기고파 주변에서는 정한석 씨가 구두쇠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평생을 모은 1억원을 동생을 위해 기부한다는 것을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 씨는 이렇게라도 동생을 기억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제 내 나이가 85세입니다. 북에 있는 용석이는 아마 81세가 되었을 겁니다. 작은 바람이라면 여기서 끌려간 사람이지만 북에서라도 용석이가 아직까지 살아있었으면 합니다. 혹시라도 제가 동생의 모교에 기부를 한 일이 동생에게 알려져 동생의 소식을 한번 만이라도 들으면 소원이 없을 것입니다. 동생이 찾아오지 못하더라도 혹시 동생의 자식들이 아비의 모교를 찾아 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동생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면 이들이 나중에라도 아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동생의 후배들이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길 인터뷰 내내 눈물을 훔치며 메인 목으로 이야기를 이어간 정 씨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기부가 동생을 기리는 일뿐만 아니라 동생의 후배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유능한 학생으로 성장하는데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학교를 떠나며 한발 한발 내딛는 정한석 씨의 발걸음에는 60년간 지속된 동생 용석 씨를 향한 애틋한 형제애가 고스란히 묻어 나오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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