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본심에 오른 원고는 SF, 역사 소설, 동시대 멜로, 디스토피아 등 다양한 장르를 가로지르며 고른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연세-박은관문학상의 특성상 응모작들은 미완결 원고로, 심사는 한 편의 소설이 끝까지 밀고 나갈 만한 역량과 설계를 갖추었는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본심에 오른 작품은 모두 열두 편이다. 그중 논의의 중심에 있었던 작품은 「흰소」, 「전환」, 「필로쿠니, 필로니쿠」 세 편이었다. 당선작은 「흰소」로 결정되었다.
「흰소」는 보도연맹 학살로 남편을 잃은 옥녀와 그 아들 용화의 80년에 걸친 생을 따라가는 역사 소설이다. 보도연맹 학살과 경산 코발트광산, 제주 4·3을 한 가족의 시간 속에 끌어안으면서도 고발이나 이념적 주장으로 기울지 않고 슬픔과 기다림이라는 감각으로 역사를 통과하고 있다는 점, 한국 현대사의 가장 무거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한 어머니와 아들의 기다림으로 환원해 내는 균형 감각에 신뢰가 갔다. 무엇보다 고시레라는 인물의 독창성이 돋보였다. 마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젖은 흙에 알아볼 수 없는 글을 새기는가 하면 해골을 안고 산을 내려오는 이 존재는 증언될 수 없는 것을 증언하는 형식을 소설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로 보인다.
‘흰소’라는 제목이 부재함으로써 작동한다는 발상, 송아지를 훔쳐 판 돈이 아궁이에서 소처럼 느리게 타들어 가는 장면 등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밀도 역시 응모작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했다. 용화의 서울 시절 서사가 늘어지며 학살과 기다림이라는 소설의 중심 하중을 일부 희석시킨다는 점, 고시레의 산문시 삽입부가 서사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는가 하면 신화적 모호함을 해소해버린다는 점은 향후 완성 과정에서 보완이 필요한 대목으로 짚어둔다. 결말부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상징들이 너무 정연하게 닫히지 않도록 여백을 남기는 방향 또한 권한다.
「전환」은 근미래 어느 시점, 노인을 데이터로 지우고 시설로 이송하는 사회를 그린 디스토피아 연작이다. 모종의 반전과 더불어 정리된 방을 사무적으로 기록하는 인터루드의 절제된 문체가 막막한 미래를 감각적으로 전달했다. 동그라미, 냄새 등의 모티프가 여러 부를 가로지르며 일관되게 직조된 점도 평가받았다. 그러나 인물별 서사의 밀도 편차, 챕터간 연결 고리가 헐겁다는 점이 지적되며 수상에 이르지는 못했다.
「필로쿠니, 필로니쿠」는 임팔 전선에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까지, 조선인 군속과 아이누 병사와 혼혈 간호사를 한 서사 안에 엮어낸 트랜스내셔널 식민지 역사 소설이다. 제목의 언어유희, 조선어와 인도네시아어가 뒤섞인 ‘라수르 어’라는 발명, 모기장을 만드는 라즈미의 손길이 보여주는 생활의 윤리는 공모전에서 보기 드문 기획력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4장에서 10장의 공백으로 인해 1부와 2부 사이의 정서적 연속성이 훼손되었다. 또 2부 초반 도쿄 시퀀스가 완충재처럼 길게 늘어지는 점, 김봉원이라는 형의 서사가 본 서사와 좀처럼 접합되지 못하는 점 등도 그 전까지 쌓아온 리얼리즘적 호흡과 이질적으로 충돌했다.
세 작품 외에 「케이지」도 비중 있게 논의되었다. 인간다움과 영생을 둘러싼 철학적 사유의 밀도, 세계관을 설명 없이 생활 속에 녹여내는 솜씨는 분명한 미덕이었으나 회상과 철학적 대화로만 채워져 있어 소설이라기보다 SF 설정집 또는 에세이에 가깝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변방의 굿천사」는 다큐멘터리 편집을 액자로 삼은 형식적 실험과 굿판, 세신사 장면의 감각적 밀도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편집실 장면에서 감독과 편집자가 작품의 의미를 직접 설명해버리는 대목이 거듭 반복되어 독자가 발견해야 할 것을 작품이 앞서 말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흰소」가 남은 분량을 완성해 가는 동안 이 소설이 이미 보여준 미덕, 증언될 수 없는 것을 증언하는 형식을 끝까지 지켜내길 바란다. 수상자의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김성중, 김숨, 박혜진, 정한아, 조강석)
대표집필 박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