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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이양자 교수(식품영양학)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6-07-31

"연세는 제 인생의 기적입니다" 남은 생은 연세에서 배운 대로 봉사하며 살 것 '항산화 영양'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 대표적인 영양학자 이양자 교수가 1975년부터 2006년까지 31년간 연세를 위해 봉직하고 영광스러운 정년퇴임을 맞는다. 외증조부로부터 시작해서 이양자 교수 부부까지 4대를 이어온 연세와의 인연과 그 각별한 연세 사랑에 대해 들어 봤다. 뿌리 깊은 연세와의 인연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받은 외증조부로부터 4대를 이어 이 교수와 우리대학교의 인연이 얼마나 오래되고 깊은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그 인연의 시작은 우리대학교의 설립자인 언더우드(원두우) 박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교수의 외증조할아버지 차시헌이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온 가족을 다 모아 놓고 간증을 하였으며 온 가족, 친척이 신앙을 갖게 되었다. 외증조부는 평양 교외에 초대교회인 장천교회를 세우고 기독교 전파에 앞장섰다. 이 교수의 외조부는 평양에서 '차예수'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독실한 장로였으며, 그의 동생 차리석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수꾼으로 알려진 독립운동가로서 효창공원 김구 선생 바로 옆에 누워 있다. 이 교수는 이렇게 오랜 기독교 집안의 어머니와, 속리산 자락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고학을 하고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교수는 "언더우드 목사와 집안의 인연을 알게 되었을 때 놀라고 감격했습니다"라며 "언더우드 박사가 아니었다면, 연세가 아니었다면 저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나는 진정 연세에 고마운 존재인가, 더 열심히 연세를 사랑했어야 하는데 하고 반성하기도 합니다"라는 말을 하며 연세와의 기적 같은 인연에 대해 감사하며 깊은 애정을 표했다. 알로하의 밤을 밝힌 '성실이' MIT에서 박사되다 이 교수는 연세에서 정년을 맞이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서울에 그것도 연세대라는 좋은 학교에 올 형편이 못되는 넉넉하지 못한 목사의 딸이 연세대에 입학해 무사히 졸업하고, 미국의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좋은 가족을 만나고, 연세대의 교수가 되리라고는 쉽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학창시절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어려운 환경도 극복할 수 있었던 그녀의 저력은 신앙과 더불어 '성실함'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재학시절 4년 내내 세브란스 소아재활병원에서 학교 교사와 주일학교 교사로 일했으며, 원장이던 스캇 부인은 그녀의 기숙사비를 마련해 주었다. 이 교수는 재학 시 178학점을 이수할 정도로 공부의 짐이 매우 컸었다고 회상한다. "편안히 요를 깔고 잠을 자는 것이 소원이었죠. 밤을 새다시피 문제를 풀며 공부를 해도 시간이 부족하기만 했습니다. 화학과에서 얼마나 공부를 많이 시켰는지 몰라요. 입학 후 첫 학기가 지나고 방학 때에는 몸살을 앓았을 정도였습니다"라며 학창시절의 에피소드를 웃으며 이야기했다. "공부의 양이 많다 보니 주일도 제대로 못 지켜 회의를 느끼기도 했답니다. 전공 자체가 하나님의 일과 연결되는 봉사이어야 하는데 싶어 신학, 의학, 간호학 등으로 전과를 하는 것은 어떨는지 고민했었습니다. 그때 알로하에 잠시 머무셨던 길기수 선교사 부부가 계셨는데 고민하는 저에게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장 6절)'의 성경말씀을 찾아 주시고 기도해 주시며, 지금 하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신학 아닌 분야에서도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4년 동안 알로하의 밤을 환하게 밝힌 성실함으로 이 교수는 학과 수석 졸업을 하게 되었다. 이 교수는 차후 대학원에서는 보다 실용학문인 영양학 분야에 관심이 커졌다. 그 당시 의과대학의 이기열 교수가 "화학은 영양학의 기초가 된다"며 많이 격려해 주어 영양학자로 성장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던 그녀에게 경제적인 이유는 또 다시 장벽으로 다가왔다.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실험조교 장학금을 받았으나 여비 마련이 문제였다. 이 교수는 풀브라이트 재단의 여비지원시험에 합격하여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학부시절 실험을 철저하게 경험해 보지 못했는데 실험조교 역할을 맡았으니 걱정이 앞섰지요." 그러나 성실함으로 단련된 그녀가 아니었던가. 실험 담당교수는 매뉴얼대로 실험을 반드시 해 보고 들어가도록 지시했고 이 지시는 그녀가 조교의 책임을 완수하는 기초가 되었다. 이 지도교수는 MIT 영양학 분야 박사과정에 지원할 때 좋은 추천서를 써 주었다. 그 당시 하버드에서 공부하던 친오빠(현 프린스톤 신학대학원 이상현 교수)와 친분이 있던 화학과 선배 김장환 교수(당시 하버드 대학원생)를 만나고, 그의 격려하에 1973년 MIT에서 '영양생화학 및 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여학생의 리더십 배양과 생활과학대학 발전에 힘써 귀국한 지 오래 지나지 않은 1980년부터 이 교수는 여학생처장을 맡아 4년 반 동안 봉사했다. 그때 이 교수는 연구 욕심이 한창인 39세의 젊은 학자였지만 학교를 위한 봉사를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연구할 시간이 부족해 힘이 들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많은 학생들과 대화하고 고민하고 학생들을 만나러 경찰서에 드나들고 하며 시대의 아픔을 함께 했던 경험은 큰 보람으로 남는다"고 이 교수는 말한다. 여학생처장 시절 이 교수는 여학생들의 취업준비와 직업의식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미국 감리교 선교재단에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여 '생애개발 워크숍'을 마련해 큰 호응을 얻었다. 전체 학생 대표가 여학생 대표를 지명할 수 있었던 때, 단과대학의 추천을 받은 여학생 대표들과 MT를 갖고 대화하게 하여 스스로 여학생 대표를 선출하게 하였다. 그 당시 뽑혔던 각 대학 대표들의 상당수가 열심히 공부하여 사회 각처 요직에서 일하고 있다. 이 교수는 여학생처장(1980∼84), 생활과학대학 학장(1997∼99), 생활환경대학원장(2001∼03) 등의 보직을 맡아 봉사했으며, 1992년부터 1996년까지는 식품영양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았다. 본 연구소가 교육인적자원부 우수연구소로 지정되어, 식품영양학 연구의 필수요건인 기기를 여러 차례 지원받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교수의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 결과는 그야말로 최고 점수이다. 강의평가서에 "이양자 교수님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자체가 영광이었다"고 극찬한 학생이 있을 정도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려운 내용이라도 이 교수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쉽고 재밌게 가르쳐 주었다고 평가한다. 이 교수는 제자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 잘 되는 것이 삶의 큰 보람이라고 말한다. 퇴임 후에도 연세 교직원 건강증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파 이 교수는 '교직원 건강증진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식품영양과학연구소 교수진을 중심으로 건강증진과 질병의 예방과 관련되는 부서들, 곧 보건진료센터,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스포츠과학연구소, 상담소 등과 협력해 고지혈증관리, 금연관리, 운동관리, 영양상담 등의 프로그램 개발과 실천에 힘썼다. 이 교수는 "역대 총장님과 연구처장님들의 적극적 지원이 이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라며, 퇴임 후에도 여력을 합하여 연세인의 건강증진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었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를 맞아 유효 인력을 활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퇴임교수들의 재능을 모아 적재적소에서 봉사하는 일은 국가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또한 우리대학교 학생들의 식생활과 건강상태의 현주소를 파악, 평가하고 전반적인 지침서와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일도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동요 시 짓는 영양학자? 이 교수에게는 색다른 이력이 있다. 바로 동요를 위한 시를 짓는 '동요 작사가'라는 타이틀이 그것이다. 이 교수가 초등학교 때 글짓기대회에서 입상했던 동시 '보리 싹'에 한용희 선생이 곡을 붙인 동요가 1991년 첫 선을 보이며 이 교수에게 또 하나의 세상이 열렸다. 그날 이후 15년 여간 꾸준한 창작 활동으로 이 교수는 '꾸중일랑 조용조용 조금만 해주세요', '큰 나무 되려면' 등 두 권의 동요집과 두 개의 음반을 발간하며 동요 보급에 일조하고 있다. 이 교수는 앞으로 여력이 있으면 주일학교 어린이성가도 더 만들고 우리 동요를 영어로 번역해 미국 교포 어린이들에게 전하는 작업도 하고 싶다고 했다. 또한 이 교수는 우리대학교 교수합창단 창단 멤버로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으며 2004년에는 ‘새 연세의 노래’ 공모전에서 장려상(임준희 교수 작곡)을 받기도 하는 등 이 교수의 음악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바로 이 순간이 미래를 품은 꽃봉오리 인터뷰를 마칠 즈음 이 교수는 “앞으로의 여생은 연세에서 배운 대로 봉사하며 열심히 살겠다”며 정현종 교수의 시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인 것을’의 한 구절을 읊었다. “모든 순간이 다아 / 꽃봉오리인 것을, /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 꽃봉오리인 것을!” 40여 년 전 학창시절의 성실함은 정년퇴임을 한 달 앞둔 지금까지도 교육과 연구에 열정을 쏟는 이 교수의 모습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퇴임은 또 다른 시작임을 보여 줄 이양자 교수의 행보에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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