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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기관 탐방] 한국 간호학의 요람, 연세 간호학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5-12-01

1906년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양성소 개교 - 글 : 여인석 교수(의사학과) 한국 근대학문과 고등교육의 요람인 연세는 여성에게 배움의 기회가 극히 제한되던 시절 여성을 위한 전문교육을 과감히 시작한 여성교육의 요람이기도 하다. 1894년 9월 말 제중원을 조선정부로부터 인수받은 에비슨은 미 선교회에 조선인 간호사를 훈련시킬 사람 두 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1895년 4월 6일 간호사 제콥슨(A. P. Jacobson)이 내한하였다. 미국 북장로회가 파견한 최초의 간호사였던 제콥슨은 에비슨을 도와 간호 업무에 종사했으며, 청일전쟁 및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환자 간호에 헌신하다가 아메바성 이질에 걸려 사망하였다. 제콥슨에 이어 1897년 10월 쉴즈(E. L. Shields, 1868-1941)가 제중원에 합류하였다. 쉴즈가 평소 가장 크게 비중을 두었던 것은 간호사 교육이었다. 1906년에 들어 세브란스병원의 운영이 정상화되자 쉴즈는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사 교육을 시작하기로 하고, 9월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양성소(Severance Hospital Training School for Nurses)를 개교했다. 학교의 목표는 충분한 교육을 받은 기독교 신자인 조선 여성을 충실하고 유능한 간호사로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훈련된 간호사는 당장은 병원에서 활동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지역사회 건강교육, 학교 위생, 가정간호업무, 기타 사회활동 등의 분야로 진출시키겠다는 목표로 다양한 간호 분야에서 이론과 실무를 배울 수 있게 계획하였다. 당시는 여성교육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던 때여서 처음에는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1907년 1월 두 명의 학생으로 처음 교육을 시작하였으며, 4월에는 4명으로 늘었다. 1908년에는 7명의 학생이 있었고 6월 12일에 5명이 첫 가관식을 가졌다. 마침 의학교 제1회 졸업생 6명이 모교에 남아 에비슨을 도우면서 간호학교에서 다양한 과목의 강의를 담당하여 처음으로 체계적인 강의가 이루어졌다. 또한 간호교육에 필수적인 병실 실습도 충실히 이루어졌다. 남성과 여성의 외과 및 내과, 수술실, 부인과 진료실, 의사 진찰실, 외국인 진찰실, 산과, 지역사회 간호실 등에서 실제적인 간호교육이 이루어졌다. 1908년과 1910년에는 서울 지역 외국인의 담당 지역간호사였던 버피(Burpee, E. B.)가 간호 교육에 도움을 주었고, 보구녀관의 에드먼즈(Edmunds, M. J.) 및 모리슨(Morrison, A. I.)도 크게 도와 주었다. 1909년에는 2개 학년이 되었고, 1910년 6월 10일에 첫 졸업생인 김배세(B. C. Kim)를 배출하였다. 1911년 2월 3일 두 번째로 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북장로회의 포사이드(H. Forsyth)가 부임하여 쉴즈를 도우면서 양성소 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2-3년도부터는 지원자가 많아져 처음으로 우수한 학생으로 정원을 채울 수 있었는데, 강계나 부산 등지에서 온 지원자들이 순서를 기다릴 정도였다. 학생 수가 많아지고 교수가 더 필요하게 되자 에비슨은 간호학교도 연합학교로서 운영하기로 하고 1916년 여러 교파로부터 한 명씩의 간호사를 양성소로 파견하는 데 동의를 얻어 냈다. 그 결과 호주 장로회의 내피어(G. Napier), 캐나다 장로회의 휴즈(E. Hughes) 등이 합류하였다. 1920년대부터는 교육과정이 더욱 체계화되어 3년 3개월에 걸쳐 엄격하고 충실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기독교적 사랑과 헌신의 정신을 교육기간을 통해 체득하고 아울러 충실한 교육을 통해 전문지식을 습득한 졸업생들은 최고의 평판을 받으며 병든 자를 돌보는 일과 지역사회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일에 종사했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 위에서 연세 간호학은 지금까지 한국의 간호학을 선도해 오고 있다.

 

vol.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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