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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기관 탐방] 언더우드 학당, 한국 개신교 고아원의 효시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5-06-30

김규식, 안창호 등 민족운동가 배출 1886년 봄, 북장로회 초대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서울 정동 32번지에 남자기숙학교를 열고 「언더우드 학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언더우드 학당」은 대부분 고아들을 모아 함께 기숙시키며 교육과 양육, 곧 인격형성과 신앙생활까지를 훈련하는 교육기관으로 점차 발전했다. 이는 곧 학교의 시작인 동시에 한국 개신교 고아원의 효시이기도 했다. 1890년 마펫(S. A. Moffett)이 교장이 되면서 「예수교학당」이라고 불렀고, 1893년 밀러(F. S. Miller) 부임 후에는 「민로아학당」이 되었다. 1897년 재정난으로 일시 학교사업이 중단되었으나 1901년 게일(J. S. Gale)이 「구세학당」으로 이름짓고 재건했으며 1905년 밀러(E. H. Miller) 교장 취임 후 종로구 연지동에 벽돌교사를 신축, 오늘의 「경신학교」가 되었다. 1915년 이 경신학교 내에 대학부가 개설된 바, 곧 연희전문학교의 시작이며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한 모체가 되었다. 경신학교 역시 민족수난기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고 민족운동의 한 요람지가 되었는데 김규식, 안창호, 서병호, 이갑성, 정재용, 김원벽, 김상덕 등이 대표적인 경신 출신 민족운동가들이다.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 중 한 명인 우사 김규식 박사는 언더우드가 직접 데려다 친아들 원한경과 함께 형제처럼 키운 고아였다. 언더우드 부인은 다음과 같이 김규식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이 아이(김규식)의 아버지는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고 어머니는 일찍 죽었다. 관청의 눈이 무섭고 살림이 어려워 친척들도 외면한 여섯 살배기를 우리 고아원에 데려왔다. 자꾸 울기 만해 돌려보냈으나 구박이 심하다는 소문을 듣고 원 목사(언더우드)가 통조림과 우유를 들고 찾아가니 배가 고파 울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다 죽게 되었고 죽으면 말썽만 나니 데려가지 말라 했으나 원 목사는 이 애를 데려다 애정으로 양육,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게 했다." 장로회소속 학교였던 경신은 그 선교정책과 일제교육 정책 및 신사참배 강요 등에 정면으로 맞서 온 이유로 일제시대 내내 혹독한 수난을 입었으나 현재까지 꾸준히 성장해 오고 있다.

 

vol.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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