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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모교를 위해 봉사할 때입니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5-05-31

오페라 ‘마술피리’를 성공으로 이끈 음악대학 동창회장 차인태 동문(성악 63년) 우리나라 국민 중 차인태 동문(성악 63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벌써 몇 해 전부터 그가 방송을 진행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아나운서 차인태’로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다. TV를 보며 ‘장학 퀴즈’에 나갈 우등생이 되고 싶었고, ‘미스 코리아 대회’에 출전할 미인이 되고 싶었고,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노래할 연예인, ‘올림픽 대회’에서 활약할 운동선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줄 의사가 되고 싶었다. 이렇게 젊은이들의 꿈 속 어딘가에는 늘 차인태 아나운서가 함께 있었다. 차 동문은 우리나라 방송사에 길이 남을 30여 년에 걸친 방송 생활에서 은퇴하고, 현재 평안북도 도지사로 헌신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대학교 동문회 부회장과 음악대학 동창회장으로서 모교의 발전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최근에는 연세 창립 120주년과 음악대학 50주년을 기념하여 공연한 오페라 ‘마술피리’의 총단장을 맡아 문화예술의 진수를 선사했다. 오페라 ‘마술피리’ 공연을 통해 연세인의 긍지와 음악대학의 저력을 한눈에 보여 준 차인태 동문. 차 동문과 함께 ‘세계 속에 우뚝 서는 자랑스러운 연세’를 이룩하겠다는 꿈이 현실로 이뤄지는 마술피리를 함께 연주해 본다. “마술피리를 불면 꿈이 현실로……” * 창립 120주년 기념 동문 합동 오페라 ‘마술피리’를 성황리에 마치셨습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많은 분들께서 찬사를 보내주시니 너무도 감사하고 기쁩니다. 이 모든 찬사와 영광은 학교, 동문회, 지원단, 출연진 등 이 공연이 있기까지 애쓰신 모든 분들이 받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오페라 ‘마술피리’라는 대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면? 처음에는 원하는 대로 공연이 잘 이뤄질 수 있을까 걱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염려와 의구심을 불식시키려는 듯 관계된 모든 분들과 학교 등 각 파트에서 적극적으로 도와 주셨습니다. 이러한 도움에 힘입어 공연뿐만 아니라 연습, 홍보, 티켓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잘 이뤄진 것 같습니다. 이번 오페라는 단순히 한편의 오페라 공연이 아니라 연세 창립 120주년과 음대 50주년을 기념하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번 공연은 우리 동문들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음악대학이 우리나라 문화예술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인정받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성공의 요체는 첫 번째 5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선후배들이 하나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연출을 맡아 주신 56학번 표재순 선생님으로부터 합창에 참여한 05학번 신입생에 이르기까지 50년을 망라한 연세인들이 한 무대에 섰습니다. 두 번째는 선배들이 기꺼이 단역을 맡고 후배들이 주역을 맡았다는 점입니다. 스승과 선배들은 최선을 다해 제자와 후배들을 받쳐 주어 공연을 빛나게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스승이나 선배들이 주역을 맡고 후배들이 단역을 맡는 관례를 깬 멋진 무대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환갑을 넘어선 60년대 학번 동문 10여 명도 재학생들과 함께 합창단으로 활약했습니다. 이번 공연에 참여한 동문들만이 보람과 감격을 느낀 것이 아니라 공연을 보신 분들도 큰 감동을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로동문들이나 해외동문들도 “너무 자랑스럽다. 감격했다. 연세를 졸업했다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럽다. 후배들이 자랑스럽다. 초청해 줘서 너무 고맙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 차인태 동문님은 학창시절 어떤 학생이셨습니까? 원래 제 꿈은 음악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어떻게 음대에 들어갔나 신기할 정도입니다. 제 원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이 의사셨고 제가 맏이여서 아버님 뒤를 이어서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대입시험에서 의과대학에 지원했다가 낙방했습니다. 재수를 하려고 결심하고 있던 차에 일간지 구석에 실린 연세대 종교음악과 추가 모집 기사를 보게 됐고, 기왕 대학에 떨어졌으니 어느 한 대학에 적을 두고 재수를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다 싶어 지원을 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입학을 하게 되다보니 저에게는 음악에 대한 소양이 전혀 없었죠. 바이엘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기초가 없어서 한참 고생을 했습니다. 제가 입학할 당시에는 신과대학 내에 종교음악과가 있었습니다. 제가 2학년이었던 1964년 신과대학에서 독립해 음악대학이 생겼죠. 그 이후 음악대학은 교회음악, 작곡, 성악, 기악 등 여러 학과가 생기고 현재는 재학생 700여 명, 전임교수 26명 규모로 성장해,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해 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음악대학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인 음악대학으로 성장했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일찍부터 방송에 관심이 있어서 YBS(연세교육방송국) 학생국원으로 들어가 학교방송에 쫓아다니느라 학업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F학점을 받기도 했죠. YBS에서는 학생국장으로 활동하는 등 캠퍼스를 누비며 열심히 쫓아다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YBS 경험을 바탕으로 졸업 후 KBS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을 해서 방송을 시작했다가 군복무 후 MBC에 입사해 30년 방송인으로 살게 된 겁니다. * 방송인으로 활동하시는 동안 기억에 남는 일도 많으실 듯합니다.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별이 빛나는 밤에’를 생방송으로 진행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야간통행금지가 있었죠. 저희처럼 야간에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야간 통행증’이 있었습니다. 이거 한 장만 있으면 밤새도록 한강 다리를 건너 다녀도 되는 뭐랄까 약간의 특권이 있었다 할까요? 제가 방송인으로 사는 동안 집사람이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매일 새벽 1시가 넘어 집에 들어가면 어느 아내가 좋다 하겠습니까? 방송 현업 시절에는 아이들, 휴가 등이 제 사전에는 없었습니다. 가정을 알뜰히 살뜰히 돌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죠. 그간의 방송수첩을 정리해 보니 공휴일, 일요일, 휴가 등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17년 동안 일한 적도 있더군요. 우스갯소리로 4년에 한번씩 윤년이 돌아오면, 여느 해보다 하루를 더 일해야 하니 싫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정도로 저는 한눈을 팔거나 쉬지 않고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1974년 골프중계를 했던 일, 70년대 중반 최초로 볼링중계를 했던 일, 미스코리아 대회, 각종 모금 생방송 등도 기억에 참 많이 남습니다. * 젊은 방송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요즘 후배 방송인들을 보면 기회는 많지만 열정은 많이 식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인생계획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다고 할까요? 일할 때 너무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면 목표가 분산되고 그러면 성취도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결과가 만족스러울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평가나 결과는 나중의 문제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방송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 방송에서 은퇴하신 후 각종 사회활동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는 정무직 공무원인 평안북도지사로 지내고 있습니다(주: 차인태 동문은 1944년 평안북도 벽동에서 출생해 1948년 월남했다). 도민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하고 정부에서 그만하라는 연락이 올 때까지 열심히 활동할 것입니다. 그 외에 ROTC 중앙회 회장으로서 후배들과 조직에 봉사하고 있고, 유니세프, 사회복지 공동 모금회, 생명의 전화 등을 통해 미력하나마 사회봉사를 돕고 있습니다. * 솔리스트 앙상블을 통해 성악가로서도 활약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솔리스트 앙상블은 음악 좋아하는 분들끼리 모여서 1년에 한번씩 공연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음대 재학시절 KBS합창단에 잠시 소속됐었는데, KBS합창단에서 활동했던 분들을 주축으로 80대부터 30대 후반까지 남성 성악가 80명이 함께 무대에 오릅니다. 올해도 세종문화회관에서 12월말에 공연을 할 예정입니다. 솔리스트 앙상블 공연의 관객 중 절반 이상은 고정 팬일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연세인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1963년 제가 입학할 때 명예총장이셨던 용재 백낙준 선생이 “연세는 연세인의 연세입니다”라고 하셨던 것이 아직까지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동문들은 모두 보석같이 귀한 분들입니다. 이 귀한 분들께 우리가 모교를 위해 희생과 봉사할 수 있는 시간이나 기회는 결코 많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더 성공해서, 더 돈을 많이 모아서, 더 유명해져서 학교를 도와야지 하면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번 마술피리 공연을 준비하면서 제가 준비위원단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올해는 모교 120주년, 음악대학 50년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를 비롯해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음악대학 100주년 때는 아무도 이 자리에 없을 거라는 겁니다. 기왕 아이디어와 시간과 정열을 쏟기로 했으니 제대로 한번 해 봅시다.” 마지막으로 이번 마술피리 공연을 통해서 연세 120년의 저력과 음악대학의 자긍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음악대학 50년의 새로운 역사 한 페이지를 썼다고 자부합니다. 마술피리가 성공적으로 막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신 많은 분들의 애정과 봉사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vol.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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