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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기타 소식] 이달의연세역사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4-08-02

 - 1962년 8월 20일부터
하루 여섯 말로 시작한 「연세우유」
                                한 병에 7원씩-

  「연세우유」라 하면 지금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 만치 유명하다. 생산량에서는 모르겠으나 그 품질에 있어서는 국내 최고 수준을 지키고 있다 한다. 그러나 그 시작을 되돌아보면 어쩌면 그리도 옹색했던가 할 정도였다. 흡사 옛날 보릿고개를 연상케 했다.

  요즘 학교 식당에 「연세목장」에서 나오는 우유가 교수들과 학생들의 절대적인 인기리에 모자라서 법석을 할 정도로 팔리고 있다. 1홉들이 한 병에 7원씩 받는 이 우유는 지난 6월 20일 기독교 세계봉사회가 본 대학교 목장에 보내온 10마리 젖소가 벌써 활동(?)을 시작하여 8월 20일부터 식당에 그 얼굴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 현재 이 목장에서 생산되는 우유량은 하루 「네 마리가 일일 평균 여섯 말」을 생산하는데 그것으로는 학교 식당에 「충분히 공급」하기도 부족하다 라고 「연세춘추」 제298호(1962년 9월 3일)에서 저간의 사정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부족한 우유가 어느 세월에나 우리에게 먹고도 남을 만치 공급될 날이 올까」하는 간절한 소망으로 끝을 맺었다. 아울러 우유가 「연세목장」에서 키우는 네 마리 젖소에서 나오는 우유임도 알려주고 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도 아니건만 「연세목장」이 연세캠퍼스 안에 있었다 하면 더러는 설마 하겠지만 한때 캠퍼스 안에 목장이 있었다. 지금의 연세 과학관 넘어 서쪽 일대 5만여 평 터에 14,000여 평 목초지를 조성한 초원 위에 젖소가 유유히 풀을 뜯고 있었다.

  본 대학교에서는 4년 전부터 체육관 뒷산 너머 5만 평의 땅을 개간하고 「유솜」으로부터 목초 씨앗을 받아 이를 길러 많은 목초를 저장해 왔다.(연세춘추 제281호 1962년 3월 26일)라고 하였다. 그리고 목초지로 조성된 목장에 젖소가 들어오기는 1962년 6월 20일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하이퍼 프로젝트」에 따라 오하이오산 홀스타인 젖소 10마리가 지난 20일 본 대학교 목장에 도착하였다. 이번에 도착된 젖소는 암소 9마리와 수소 1마리로 이 소들은 30일간 먼 항해 끝에 지난 9일 부산항에 도착하여 완전한 방역작업을 마치고 체육관 뒤에 자리 잡은 5만여 평으로 개간한 목장에 들게 되었는데 앞으로는 1937년 문과를 졸업한 동문이자 젖소가 들어오기 까지 온갖 힘을 써 온 박병호 동문이 사육을 도맡게 되었다. 이 연세목장에서 나오는 우유는 학생식당, 병원, 소아마비 재활원 등지로 배달되며 나머지는 우유조합에 보낼 것이라 하였다. … 이제 머지 않아 연세 캠퍼스에 미녀 우유배달부들이 나타날 것이니 기쁘기만 하다.(연세춘추 제294호 1962년 6월 25일)
  그리고 「연세우유」를 처음 생산할 당시에는 극히 원시적인 살균방법을 써서 처리하였으며 우유병은 미군부대를 통해 나오는 코카콜라병을 소독하여 콜크로 마개를 막아 병으로 쓰기도 했던 것이다 -(「연세대학교 농업교육」 연세대학교 농업개발원, 1973년)

  이쯤 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 이야기와 별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체육관 뒤쪽 언덕 넘어에 있던 「연세목장」도 그 자리에서 오래 배겨나지 못했다. 점차 단과대학 수가 늘어나자 캠퍼스 건물도 팽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학부와 공학부가 합쳐져 이공대학으로 있던 것이 각각 이과대학과 공과대학으로 분립되면서 공과대학에 독립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공과대학(제1공학관) 건물을 짓기 위하여 그 자리에 있던 운동장을 「연세목장」으로 옮겨 가고 「연세목장」은 현 북문 쪽 언덕 넘어로 옮기게 되었다. 북문 쪽 목장 터는 이미 1959년 당시 총장이던 백낙준 박사가 장차 목장 예정지로 사 두었던 3만4천여 평으로 1969년 4월에 그 목장 예정지로 옮겨 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오늘의 「연세우유」로 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다져 1971년 봄에는 성암관 밑층에 작업장을 꾸미고 우유처리장 시설을 보완하여 서울시로부터 정식 시판 허가를 받아 오늘의 「연세우유」로 성장하였다.

  이렇듯 연세대학교에서 「목장」에 이어 「우유」로 명성을 얻기 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그 기저에는 연희전문학교 농과 교육정신이 스며 있어던 것이다. 1915년 4월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연희전문학교가 개교할 당시 문과 상과 이과 그리고 농과도 개설하였다. 그러나 그때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은 농사란 씨앗 뿌리고 거름 주고 김 매는 것을 농사의 전부로 알고 있던 터라 그런 것을 배우러 전문학교까지 갈 필요 없다 하여 농과 지원자가 없어 1921년 3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농과에 더 이상 학생을 모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1929년에 연희전문학교 대확장 7대 사업의 하나로 농과 부활 계획을 세웠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후 다시 기독교청년회연합회와 공동으로 연희캠퍼스 내에 「농촌지도자 양성소」를 설립하여 1932년 11월 15일부터 매년 2회씩 남녀 농촌 지도자를 교육시켰으나 그도 얼마 못가 중지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일제는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시국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우리 민족에게는 무엇보다 생존이 지상의 과제가 되니 농업교육은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되었다.
  그후 혼란했던 해방 정국을 겨우 벗어나자 이번에는 전쟁의 참화가 연세로 하여금 농업교육을 주저케 했던 것이다. 그러다 새로 시작한 젖소농장을 기반으로 하여 1967년 2월에 서울시 교육위원회 인가를 얻어 「농업개발원」을 설립하였다가 1973년 7월에 정식 문교부 인가를 얻어 연세대학교 부속 교육기관으로 되자 곧 이어 초급대학으로 승격을 꾀했으나 좌절되고 그리고 농업개발원도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냥 문을 닫은 것이 아니라 「연세우유」라는 유산을 물려주고 문을 닫은 것이다.

  그런데 불가사의하다 할 수는 없으나 언뜻 수긍되지 않는 일이 있다. 1968년 8월 26일부터 새롭게 연세 명물로 화려하게(?) 등장한 「연세빵」의 운명이 바로 그것이다.
  
  가정대학(현 생활과학대학)에서 농림부 위촉으로 지난 3월부터 연구해 오던 「연세빵」을 논지당 조리실에서 만들어 26일부터 논지당과 학생식당 두 곳에서 판매한다. 연세인의 체력향상을 위하여 칼슘, 단백질 강화 빵은 우유와 함께 판매되며 가격은 50g짜리 두 개에 15원이다.
  한편 가정대학에서는 지난 20일부터 대한체육회 의뢰로 올림픽 파견 선수용 영양식 빵을 제조하고 있는데 앞으로 교내 행사시 신청에 따라 50개 이상 주문 받을 예정이다
.(연세춘추 제510호, 1968년 8월 26일)

  「연세우유」는 그 구차한 형편에서 출발하여 오늘의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연세빵」은 농림부와 대한체육회 같은 유수한 기관의 보살핌까지 받아 가면서 시작하였으나 그 끝이 사뭇 다름은 천조天助의 차이에 따름인지 인위人爲의 다름에 인함인지 그것을 알 수 없다.

 

 

vol.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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