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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기타 소식] 이달의 연세역사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4-06-30

「대학원의 시작」-  1950년 6월  -


  

「대학원 드디어 개강」 - 그간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거의 폐강상태에 빠져 있던 대학원은 한영교 박사를 원장으로 모시고 금년 5월 20일부터 드디어 개강을 보았는데 최고 학계의 미약한 현실에 비추어 각층으로부터 많은 찬사와 촉망을 받고 있다.(연희타임스 속간 제1호, 1952년 7월 9일)

  이렇게 부산 피난지 천막교실에서 대학원이 다시 개강하였다고 짤막하게 알려 줄 뿐이다. 그리고 시작이 어떠 하였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6·25전쟁 전에 시작되었음만 알게 할 뿐이다.
 
  그런데 「연세대학교 대학원 50년 약사」에 보면 다음과 같이 대학원의 시작에 대해 간단하게 서술해 놓았다.
  이미 연희대학교에서는 1946년 8월 15일에 인가된 학칙에 따라 대학원 입학과 재학 기간 등에 대한 학칙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 학칙은 문교부의 신교육법 제정에 따른 1950년 5월 25일자 인가 학칙으로 대부분 계승되었다. 즉 문교부의 인가 학칙에 따라 대학원의 설립이 정식 인가받게 되고 그에 따라 초대 원장에 김윤경 교수가 취임하고 제1회 대학원 신입생으로 32명이 선발되었다 하였다. 그리고 6·25사변으로 중단되었다가 다시 개강하여 1954년 3월 20일에 대학원 석사학위 수여식이 거행되어 대학원의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하였다.
  너무 짤막하면서 애매한 기록에 출처도 모호하게 기술되어 있다. 도무지 아리송한 기록일 뿐이다. 여기서 초대 대학원장으로 알려진 김윤경 교수의 증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본 대학원은 단기 4283년(서기 1950년) 6월 새 학년 시작과 함께 창설되어 30명의 학생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6·25사변으로 중단되었다.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였으나 대학원은 개강할 수 없었다. 또 사변 전까지 등록을 마친 학생은 10명에 불과하였다. 단기 4285년(서기 1952년) 5월 새 학년이 시작될 때 중단되었던 본 대학원은 피난지 부산 영도 임시교사에서 신입생을 모집하여 지원자 26명 중에서 13명을 뽑았다. 영문학 1명, 사학 2명, 정치학 3명, 교육학 1명, 경제학 2명, 수학 1명, 신학 4명, 그리고 사변 전 입학생으로 복교한 2명(사학 1명, 신학 1명)을 합하여 15명으로 개강하였다. - 김윤경 「연희 대학원」, 연희동문회보 제3호, 1953년 7월 1일

  이 기록에 의하면 「1950년 6월 새 학년 시작과 함께 창설」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변 전 신입생」으로 복교한 사학과 1명은 이광린이고, 신학과 1명은 김찬국이었다.
  사변 전 대학원 입학생으로 연희대학교 석사학위 제1호로 받은 이광린의 증언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남겨 놓았다.

  1950년 5월 대학을 졸업하자 곧 대학원에 응시하여 6월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수업은 한 시간도 받지 못하고 6·25동란을 맞았다. 서울이 공산군에게 점령당한 3개월간 여기저기 피난다니다가 수복 후 돌아와 보니 한국사를 강의하던 두 분, 이인영 홍순혁 교수가 모두 북으로 납치되어 갔음을 알게 되었다. 이때 나는 대학원을 포기하기로 결심하였다. 교수가 없는 이상 그것 밖에 택할 길이 없어 보였다. 따라서 시국이 안정되면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해 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1951년 가을부터 부산 피난처에서 대학의 문이 열리고, 1952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강의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때 나는 서울에 있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정부가 서울로 돌아올 것으로 믿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부산에 빨리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부산 영도에 대학의 가건물이 세워지고 문을 열게 되었으니 강의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정말로 당황하였다. 대학원에서 한 시간의 강의도 받은 일도 없었지만 나의 전공 또한 뚜렷하지 못 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한국사를 공부해 보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기는 하였으나 아직 논문 한 편 발표한 일이 없던 처지였다. 부산에서는 나에게 대학원을 졸업하기 전에 조교라는 자리를 주었으나 나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 이광린, 「한국근대사론고」, <나의 학문편력>, 일조각, 1999년.

  그외 이기을 교수 회고에도 “연희대학교 대학원은 1950년 6월 6·25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몇 주일 전에 정식 인가를 받아 석사학위 과정에 첫 입학생을 선발하였으나 개강도 변변히 하기 전에 산산이 흩어져야만 했다(이기을, 「도운島雲 자서전」, <대학원>, 박영사, 1999년) 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과 증언으로 볼 때 연희대학교 대학원의 시작은 1950년 6월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리고 대학원 개강은 6월 중순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1950년 6월 25일 사변이 나던 날은 일요일이었고 그 이튿날 월요일은 포성이 들려오는 중 정상 수업이 이루어졌으나 화요일 첫 시간에 「야크」기가 여의도 상공에서 공습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긴급 교수회의를 열고 무기 휴업으로 들어가기로 발표하였고, 대학원 신입생이 「한 시간」도 강의를 듣지 못하거나 「변변히」 듣지 못했다 함을 보아 무기 휴업으로 들어간 6월 27일 직전에 개강하였음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데 「연희타임스」 제20호(1950년 3월 20일)에 희한한 사실 하나를 전해 주고 있다. 이 「연희타임스」는 연세 도서관이 「용재관」 시절까지 수장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현재는 어떻게 서실 失되었는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한국연구원 도서관에만 전래되고 있는 것에 보면 「연희대학교 대학원」과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이 「조속 합동하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의 좌담회 기사가 실려 있다. 1950년 3월 7일 있었던 양교 학생대표 좌담회였다.
  이때에는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합동론이 한창 진행중이면서 한편으로 이화여자대학과도 합동이 논의되던 중이었다. 그러나 이화여대 측의 소극적인 태도로 전교적인 합동이 지지부진하였으나 좌담회 상에서 학생대표들은 「대학원 합동만이라도 조속한 실현을 희망하고 있으며 그밖에 자료 공동이용, 교수 교환의 유익, 기타 양교의 합동을 찬성하는 의견」이 오고갔다 하였다. 이로 볼 때 연희에 대학원이 설립되기 전에 학생들은 한발 앞서 이화여대와의 합동이 더 급했던 모양이었다.      

(자료제공-연세기록보존소)

 

vol. 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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