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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기타 소식] [이달의연세역사]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4-05-17


「노천극장」
-  1933년 5월 31일 동양 최대 규모로 완공  -



  1932년 11월 25일부터 28일까지 전 교직원 및 생도가 각각 하루씩 부역하므로 기공하여 1933년 5월 말일에 준공하였다. 총 공사비는 약 2천원이었고 7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집회장이 되었는데 동양 최대의 노천극장이니 모교 연희전문의 발전을 세계에 알리는 단계 중에 하나라 하였다. - 연희동문회보 제1호, 1933. -

  연희 시절 전체 학생이 다 모일 수 있는 실내 집회장으로 대강당이 있었다. 지금 있는 대강당보다 앞서 있던 첫 대강당으로 지금의 「스팀슨관」 2층 북쪽 공간이었다. 약 3백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나 점점 학생 수가 늘어나게 되매 그 공간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자 2층으로 만들어 5백명까지 수용할 수 있게 했으나 그래도 연희 집안 식구만 겨우 다 수용할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이라든지 연극과 음악회 같은 바깥 손님까지 참석할 경우 대강당의 공간으로는 태부족이었다. 그리하여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노천극장을 짓게 된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설립 초기에는 문과, 수물과, 상과 외에 농과도 있었다. 우리나라가 발전하자면 농업기술도 발달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세운 농과였으나 1회 졸업생만 내고 문을 닫게 되었다. 그때는 농사라면 거름 주고 김 매는 것이 전부 일 때라 시골 부로父老들이 농사 배우려고 그 어렵고 높은 전문학교까지 갈 것 없이 자기네가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으로 농과에 보내지 않으니 따라서 농과가 폐지되었다.
  이때 농과 교수로 부임해서 화학을 가르치던 밀의두(密義斗 , Edward H. Miller) 교수가 화학 외에 측지 측량에도 식견이 높아 그가 측량하고 그의 주도로 학생들을 동원하여 터를 닦은 것이다. 그리고 공사를 시작한지 반 년만인 1933년 5월 말에 완공하게 된 것이다.

  연희 최초의 야외극으로 입센의 「바다의 부인」이 1932년 6월 25일 밤에 공연되었다. 무대는 캠퍼스 중앙 돌계단에 가설하고 공연하였던 바 야외극으로 첫 시도였음에도 예상 밖으로 크게 호응을 얻게 되어 보다 본격적으로 야외극 공연장소의 필요가 절실해 졌다.
  이에 용기를 얻은 연희전문학교에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야외극(Pageant) 등을 공연할 수 있게 원형 야외극장(Bowl)을 만든 것을 본 받아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공사의 노역은 미국 대학 교육훈련의 하나로 지켜오던 근로봉사 일(Labor Day)의 전통에 따라 학교 전체가 휴업을 하고 교내 시설을 개선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1932년 11월 25일부터 학교 전체가 겨끔내기로 근로 봉사에 동원되었다.
  그때 공사하던 모습을 담은 영화필름이 지금도 학교에 남아있다. 전교생은 물론 에비슨 교장도 그 유명한 은발을 흩날리면서 삽질을 하고, 교수 부인인듯 한 부인들도 학생 틈에 끼어서 괭이로 계단을 만들고 가마니에 흙을 담아 둔덕을 만드는 그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드디어 1933년 5월 31일 완공했다. 그리고 그 완공 기념으로 6월 7일 기념 음악회를 공연하였다. 이 기념 음악회에 대해 「동아일보」(1933년 6월 8일자)에서는 「조선의 한 명물, 노천극장 출현」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1933년 6월 8일자)에는 「조선에서 처음되는 연희의 노천극장」이라는 제목으로 기념 음악회 소식을 전해 주었다.   
 

 연희전문학교에서 그 학교 구내 소나무 숲속에 만든 동양 유일의 노천극장은 7일 밤 8시에 그 극장에서 성대히 낙성 기념 음악회를 열었다. 연희전문 관현악단의 「모짜르트」 서악으로 개회되어 에비슨 교장의 개회사와 이춘호 교수의 공사 보고가 있은 후에 내빈으로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 여운형 중앙일보 사장과 조선일보 편집국장 주요한씨 등이 차례로 단에 올라가 축사가 있고, 제2부로 들어가 음악의 순서로 진행하였다.
  첫 여름 밤 별들이 총총한 하늘을 지붕 삼고 보름 달빛이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둥근 스탠드에는 약 2천명의 남녀 내빈으로 성황을 이루었다.(동아일보, 1933년 6월 9일)
  
  그 뿐 아니었다. 이 음악회를 위해 임시열차가 7시 15분에 경성역에서 출발해서 밤 10시 40분에 신촌역에서 되돌아온다는 소식까지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이어 야외극 공연도 개최하였다. 원래 공연이 예정되기는 6월 29일이었으나 연일 비가 내려 부득이 연기하다가 7월 1일에 공연되었다. 본격적인 야외 원형극장(Bowl)에서 야외극(Pageant)이 공연된 것이다.
  연희 문우회 연극부(연희 극예술연구회 모태) 주최, 조선일보사 학예부 후원으로 「던세이니」 원작, 이하윤 번역의 「아라비아 사람의 천막」과 「뻐꾹새」(한자 이름으로 곽공郭公) 그리고 「삭발」의 세 가지 연극을 준비하였으나 「삭발」만 당국의 공연금지 지시로 당일 공연하지 못했다. 이 「삭발」은 박영준 교수가 재학 시절 쓴 작품이었다. 이때에도 신문에 신촌으로 가는 임시열차가 경성역에서 7시에 떠난다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또 1934년 10월 12일에는 노천극장에서 원한경(元漢慶, H. H. Underwood) 교장 취임식이 거행되어 숱한 내외 귀빈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렇듯 노천극장이 생기고부터 수많은 연극과 음악회와 그리고 크고 작은 모든 행사가 이곳에서 열리게 되고 심지어 전교생 채플시간도 이 노천극장에서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노천극장에서 환의의 잔치만 열리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부터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소리에 그 이튿날 월요일 수업을 불안한 마음으로 넘겼으나 27일 화요일 첫째 시간에 「야크」기가 여의도 상공을 날면서 기관총을 퍼붓는 통에 더 이상 수업을 계속할 수 없어 전교생을 노천극장에 모아놓고 무기휴학에 들어간다고 발표하였다. 그것이 일제 총독부로부터 고난을 받은 후 두 번째 고난의 시작을 알리는 발표였다.

  노천극장을 사랑하는 김동길 교수(전 부총장,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1951년 영문과 2회 졸업)는 노천극장을 「연세의 자랑이요 한국의 명물」이라 하면서 「푸른 숲에 자리 잡은 청춘의 상징」으로 수 많은 졸업생들이 노천극장에 무한한 애착과 동경을 느낀다고 했다.
  세월이 가고 기대가 변해도, 혁명이 오가고 정권이 바뀌어도 노천극장은 그대로 있으니라!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를 젊은 이들이 모여 앉았을 먼 후일을 상상하여 본다.(김동길, 영원한 청춘의 상징 노천극장, 연세춘추, 1963년 7월 22일)

(자료제공-연세기록보존소)

 

vol. 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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