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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기타 소식] 이달의 연세역사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4-05-01

「모교일/Alma Mater Day」
- 1956년 5월 10일 제정 -


 

  연희전문학교 창립 기념일(Founder's Day)를 처음 지키기 시작한 것은 1924년부터였다. 매년 4월 넷째 금요일로 지키기로 한 것이다.

  해마다 4월 넷째 금요일로 지켜 오던 연희 창립 기념일이 일제 말에 이르러 연희를 빼앗기는 바람에 몇 해 동안 지키지 못하다가 광복이 되자 다시 지키게 되었다. 그리고 6?25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창립 기념 행사가 더 한층 다채로워졌다. 각 단과대학 대항 체육대회와 학생들의 가장행렬이 있어 만장의 폭소를 자아내게 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동문들은 한낱 관객에 불과했다. 해를 거듭 할 수록 동문이 늘고 번창해 가는데 그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러던 중 1956년 5월 10일(목) 교무위원회에서 연희 창립 41주년 기념 행사를 5월 19일에 거행하되 졸업한지 25년이 되는 졸업생과 그리고 그 이전에 졸업한 전체 동문까지 다 다시 학교로 찾아오는 「Home Coming Day」(또는 Alma Mater Day)를 「모교일」이라 이름하여 새롭게 지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예정했던 5월 19일에 창립 기념식을 지키지 못했다. 뜻밖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해공 신익희 선생이 급작히 서거하여 23일에 국민장으로 치루기로 되어 부득이 5월 14일 교무위원회에서 25일(금요일)로 연기하기로 결의하였다.

  첫 모교일 행사는 1956년 5월 25일(금요일) 제41회 연희 창립 기념일에 거행되었다.

  오늘 연희 창립 41주년 기념식(4월 넷째 금요일을 연기한)과 특별행사로 25년 전 1931년에 졸업한 졸업생(그 이전 졸업생과 합하여)의 「모교일」, 신축 대학원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모교일 순서에 조의설(1931년 문과 졸업) 교수 사회로 부총장 최현배씨 환영사, 이환신(1931년 문과 졸업)와 원소아(1931년 상과 졸업)씨 회고담에 이어 1931년 졸업생의 기념품(매년 10만환씩 장학금을 내기로 함) 드림이 있었다.(김윤경 일기, 1956년 5월 25일)  

  두 번째 「모교일」 행사부터는 사정이 좀 달라져 버렸다. 연희대학교 창립 기념일로 지켜 오던 것이 「연세대학교」로 바꾸어진 때문이다.

  오후 두 시에 교무위원회가 열렸다. 전일 이사회에서 연세대학교로서 창립 기념식을 5월 둘째 토요일로 거행하기로 결의되었다 했다. 이는 연희전문학교가 5월 14일에 허가되었고, 세브란스도 5월에 허가된 때문이라 했다. 그리하여 올해는 5월 11일 토요일에 제1회 창립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되어 위원 6명(조효원 신동욱 김용현 최이순 김하태 전진성)을 뽑아 맡기기로 하였다. 그리고 5월 11일에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 부총장 취임식, 모교일 행사, 교내 체육대회, 연세 여왕 대관식들을 기념 행사로 거행하기로 하였다.(김윤경 일기, 1957년 4월 22일)

  이번에는 여학생 중에서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한 학생을 투표로 선출하여 「연세 여왕」으로 추대하는 대관식 행사가 더 늘어났다. 이 여왕을 「5월의 여왕」(May Queen)이라 하여 남학생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졸업한지 25년이 되는 1932년 졸업생 「모교일」 행사는 오후 1시에 노천극장에서 신동욱(1932년 문과 졸업) 교수 사회로 백낙준 총장 인사말에 이어 사각모를 쓰던 그때 모습으로 합창과 회고담에 이어 기념품으로 도서관이 낙성되면 체경을 기증하겠다는 기증 단자를 들이고 교가로 끝났다.
  
  제3회 「모교일」 행사를 맞이한 날에 두 가지 일이 벌어졌다. 그 한 가지가 연세 동산에 「해태」라는 새 식구가 늘게 된 일이다. 또 한 가지 일은 연세대학교로 합동할 때 이사회에서 연희 동문회와 세브란스 동문회는 1970년까지 각립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때를 맞아 하나로 합치기로 한 일이다.
  1958년 5월 10일 토요일에 제2회 연세 창립 기념식이 오전 10시에 노천극장에서 거행되고 이어서 두 번째 순서인 1933년 졸업생 재상봉 행사가 11시 반부터 같은 노천극장에서 진행됐다. 이때 처음으로 의과대학 졸업 동문들도 참석하게 되었다.
  이날 재상봉하는 졸업 동문들이 모교에 기증하는 기념품으로 「해태」 암수 한 쌍을 기증하면서 이양선(1933년 수물과 졸업) 동문이 기증사에 「우리를 대신하여 학교를 잘 지켜 주기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그 뜻을 밝혔다. 그러나 해태를 기증하기는 1933년 졸업 동문이 기증하였으나 그 해태를 구하기는 1936년에 상과를 졸업한 황환승 동문이 구해 준 모양이었다.

  「해태」라면 광화문 앞에 있는 해태를 떠올리고 그것이 대원군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멀리 마주 보이는 관악산의 화기를 꺽어 누르려고 세운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연세 캠퍼스 중앙 돌계단 위에 서 있는 해태에 대해서는 모두가 무심할 뿐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날 세운 해태도 「관악산을 바라보고」, 훗날 「연세의 노래」를 지으면서 첫 구절이 「관악산 바라보며」였다. 그때는 그곳에 산만 있었지 대학이 없을 때 였다. 아마 미리 알고 화기를 꺽을 요량이였던 모양이다.
  그 후 그 해태상 때문에 좀 시끄러운 일이 일어났다. 처음 해태상을 기증할 때 황환승 동문이 어디 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새로 만든 것이 아니고 어느 유적에 있던 것을 구해 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해태 중 왼쪽(서쪽) 것의 머리 부분이 좀 깨어져 있었다. 그 깨어진 부분 때문에 「해태상에 이상 있다」라는 학생(김혁래, 당시 사회 2년)의 투고가 「연세춘추」 제775호(1977. 3. 7.)에 나게 되자 그 후에 온전한 것으로 새로 만들어 새우게 됐다.  

 

 

vol.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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