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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기타 소식] 이달의 연세역사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4-03-02

1928년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 박물관 「연희 박물관」

두 번 문을 연 연세 박물관 - 1965년 3월 15일 재개관

 


1965년 3월 15일 박물관 재개관 현판식


연희전문학교 박물관 내부


1929년 1월 14일 조선일보 「연전의 박물실 신설」에 대한 사설

  

 

  「연세춘추」는 연세 박물관에 대한 소식을 이렇게 전했다.

  「우리나라 유일의 구석기시대 유물을 진열, 개관하게 되는 본 대학교 박물관 개관식이 지난 15일 오후 3시 30분부터 학관(지금의 언더우드관) 209호실에서 박대선 총장, 백낙준 명예총장 및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손보기 박물관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이번에 개관을 보게 된 박물관은 1964년 5월 1일 박물관 운영위원회를 구성, 개관을 서둘러 오다가 1964년 11월 공주 유물 발굴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구석기 유물을 진열, 개관하게 된 것인데 학관 208호실을 진열실로 사용하고 있는 이 박물관은 앞으로 우리나라 역사 편력의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연세춘추, 제386호/1965년 3월 22일)

  그후 박물관은 언더우드관을 떠나 청경관(지금은 없어 진), 광복관(이 건물마저 지금은 없어 진), 그리고 백양관 남쪽 둔덕 밑에 있던 임시 콘센트 건물(처음에는 학생식당으로 쓰다가 나중 학군단 본부로 쓰던)에 들어 있다가 중앙도서관 신축으로 이것마저 헐리게 되 대강당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모두 아홉번 이사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열번째 이사로 현 백주년기념관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연세춘추」는 의아하다할지 아니면 해괴하다할지 좀 이상한 소식을 전해 주고 있다. 「각 대학이 박물관을 세운 때는 고려대학 1934년(당시 보성전문), 이화여대 1935년(당시 이화여전), 서울대학 1940년(당시 경성제대) 등인데 우리 대학 박물관은 그보다도 훨씬 뒤인 1965년에 세워졌음」이라 한 것이다.(연세춘추 제862호, 1979년 10월 8일)

  이 때문이였는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대학 박물관계에서는 「한국에서의 대학 박물관 활동은 일제시대인 1934년에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민속자료를 중심으로 유물을 수집·전시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문화」 제52집, 1998년 12월)하여 연세의 박물관 시작을 이보다 35년이나 뒤로 늦잡아 놓았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멀리 떴어도 연세의 박물관 시작이 이와는 사뭇 달랐음을 알았을 것이다.

  「연희 박물관」이 처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을 1929년 1월 13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각각 사설로 소개하고 보도기사로 연희 박물관을 소개함으로서 시작되었다.
  「민간으로서 역사적 보배를 보존하기 위하여 세워진 기관은 이것이 실로 처음이라」(동아일보 1929년 1월 13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번 연희전문학교가 솔선하여 교내 박물관을 계획한 것은 조선인 민간기관으로 이를 계획함이 처음이니만큼 의의있는 사업이라 아니 할 수 없다」(동아일보, 같은 날자 사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에서는 수년전부터 그 학교 안에 내용이 충실한 박물관을 설치하여 … 장래에는 박물관으로 독립시켜 일반에게도 공개할 터이라는 바 한 학교로서 조선의 고대 유물을 수집하여 박물관을 설치케 된 것은 조선에 있어 처음되는 뜻깊은 계획이라 하겠다.(조선일보 1929년 1월 13일)
  이뿐 아니라 당시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원한경(H.H.Underwood) 박사는 「한국선교회지」(The Korea Mission Field) 제25권 1호(1929년 1월)에 「A Museum at Chosen Christian College」라는 글을 기고하여 연희 박물관이 설립됨과 Dr. A. I. Ludlow, Dr. H. N. Allen 그리고 정인보 교수 등 많은 유지들로부터 기증품이 답지할 것을 소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외국인에게까지 유물 기증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1931년 6월 17일 남궁억씨가 고려 숙종조 해동통보海東通寶를 비롯하여 대한 융희隆熙시대까지 우리나라 전폐錢幣 2천여점과 조선 개국 504년(서기1895년)에서 광무 8년(서기1904년) 사이에 발행된 우표 20매를 기증하였는데 이는 당시 싯가로 3천여원에 이른다는 고가품을 서슴없이 내 놓았고(동아일보 1931년 6월 27일), 그리고 위당 정인보 선생께서는 송나라 엽전 외에도 우리를 경악케 하는 유물로 화엄사華嚴寺 석경石經 잔석殘石까지 기증한 기록이 있다.(연희전문학교 상황보고서;1934년)
  또 희한한 일은 그 옛날 「엄복동의 자전거」와 더불어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로 뭇 사람이 노래 부르던 안창남씨의 비행기도 기증되어서 (연희전문학교 상황보고서;1935년) 최근 김성혁金成爀 동문(1944년 9월 경성공업경영전문 졸업)이 신기하게 구경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아펜셀러 관 남쪽에 조그마한 가건물 안에 비행기 한 대가 있어 신기하게 구경만 하였지 그 비행기 주인은 누군지 몰랐다 했다.
  그리고 초대 박물관장은 이묘묵 도서관장이 겸하고 있다가 1937년 교직원표에는 노동규 교수가 도서관장 겸 박물관장 대리로, 그 다음 1940년 5월 교직원 명부에는 조의설교수가 박물관장직을 맡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제는 안창남의 비행기가 사라지고 남궁억 선생의 우표와 위당 정인보 선생의 화엄사 석경 잔석이 종적을 감추듯 연희 시대의 박물관도 종적을 감춘 것을 다시 되찾아내고 되살려서 연세 박물관 역사는 그만두더라도 한국 대학박물관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연희가 남긴 역사에는 「Chosen Christian College Bulletin」(1931.∼1937.)에, 또 「연희편람/Student Handbook」에도 다 천편일률같이 「The Chosen Christian College Museum was established in 1928」이라 적어 놓았다.

 (자료제공-연세기록보존소)

 

vol.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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