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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기타 소식] [이달의연세역사]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3-12-01

연희학생이 일으킨 경제독립 운동
1922년 12월 15일 발기한 「자작회自作會」

- 내 손으로 지은 것을 먹고
- 내 손으로 지은 것을 입고
- 내 손으로 지은 것을 쓰고
- 땅을 꽉 붙잡고 놓지 말어라 이리해야 살리라!


 


    「자작회」 활동을 소개하는 「동아일보」기사 (1922년 12월 18일자, 12월 21일자)


   「자작회보」 창간호 / 1923년 6월 1일


  「이 당시 주목할 만한 것은 연희전문 학생 염태진廉台振(1923년 문과 졸업) 박태화朴泰華(1923년 문과 졸업) 등 5십여 명이 발기하여 만든 『자작회』의 활동이다.
  이 자작회의 목적은 자작자급自作自給·국산장려·소비절약·금주금연 운동을 일으켜 경제 독립과 철저한 국산품 사용을 장려하는 것이라고 표방했으나 참뜻은 일본물화物貨 배척과 배일排日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경향 각지로부터 많은 공명을 얻게 되었으며 학생들은 이 운동을 전개하는 방법으로 선전 전단의 살포, 가두연설 혹은 시가행진 등 온갖 방법을 이용하여 대중에게 호소했다.
  이 운동이 차차 민족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어 가자 일제당국은 이것을 방해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실패로 돌아갔다.」 (김효록,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1971년 10월 16일)

  기미년 독립운동이 수포로 돌아가자 들끓던 청년 학도의 열정이 모여 1920년 5월에는 「조선학생대회」를 결성하고 당시 연희전문 학생이던 김윤경(1922년 문과 졸업)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학생의 친목도모, 조선물산 장려, 지방열 타파 등을 부르짖은 결과, 전국의 회원 수가 2만여에 이르게 되자 이를 두려워 한 일제당국은 1922년 7월 각 학교 교장들에게 압력을 넣게되매 조선학생대회로 결집되려던 학생세력의 구심력에 동요와 약화작용이 일어나 마침내 무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일어난 학생운동이 「자작회」운동으로, 1922년 12월 2일 종로 중앙예배당에서 유지회를 열고 의논한 다음, 12월 15일에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정식으로 발기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발기문에 「조선인의 생산품으로 수출하는 것은 오직 백미 2백만석, 우피牛皮 대두大豆 등 가격이 지천한 농산품 뿐이어늘 조선인의 소비품은 거의 전부 조선인 경제권 외에서 수입하는 가격이 극귀한 공산품이므로 항상 수입이 수출보다 많아 과거 3십년 생활, 특히 지난 십년 세월에 조선의 민족적 부富는 거의 파산지경에 빠져 공업도 없고, 상업도 없이 조선인의 유일한 재산인 토지도 태반이 조선인의 손에서 나가게 되었은 즉 이대로 가면 미구에 조선인은 생업을 잃고 경제적 멸망에 빠지게 될 것은 명약관화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순전히 자활을 위하여 본 회를 조직합니다」 하였다.

  점차 이 운동에 호응하여 지방에서 지회가 결성되는 한편, 서울에서는 생산과 공급을 일관하는 산업부도 결성하고 1923년 6월 1일에는 「자작회보」도 월간으로 발간하게 되면서 이 운동이 차차 민족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어 가자, 일제당국이 이것을 방해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침체로 들어가게 되었다.

 

 

vol. 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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