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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연세 뉴스] 연세대-Leiden대 국제학술 대회 발표문 요약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3-06-15

16-17세기 조선 양반 사대부의 서양인식

구만옥(국학연구원) 


 조선왕조는 본래 화이관에 의거하여 '사대교린'을 대외정책의 골간으로 삼았다. 이러한 차등적 세계인식과 중세적 대외교섭의 기본 틀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친 기간이었다. 이즈음 조선은 서양인들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하였고, 이로 인해 17세기 이후 다양한 서양문물이 전래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은 시헌력을 구성하는 천문, 역법 등 서양과학 분야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지만 서양의 종교·풍습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 서학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서학의 우수성을 인정하는 논의들이 등장하였고, 18세기 이후의 서학긍정론, 서기도입론으로 이어져, 전통적 화이관을 극복하고 세계관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남과 발견: 극동 아시아에서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L. Blusse (라이덴 대학, 역사학)  

핸드릭 하멜과 그의 동료 선원들이 한국의 제주도 해안에서 난파되었던 1653년, 네덜란드 공화국은 세계의 권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164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네덜란드는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의 멀리 떨어진 해안까지 배에다 네덜란드 국기를 꽂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 항해자들은 항상 애써 한국 사람들과의 모든 접촉을 피했고, 때문에 이들은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한때 하멜의 모험을 보고서 암스테르담의 동인도 회사 경영진은 바타비아에 있는 총독과 고문관들에게 한국과 같은 곳에서 무역이 가능한지를 알아보았으나, 외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반감과 한국의 빈곤 등의 이유로 교역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로 인하여 한국은 네덜란드에게 숨겨진 채로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멜의 조선 체류와 조선 이해

M. S. Chi(라이덴대학 한국학)

350년 전에 제주도에 표착하여 13년이 넘도록 조선에 체류한 하멜 일행의 생활은 제주도에서의 순응기, 서울에서의 통제기, 전라도에서의 안착기 등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문화적 충격 속에서 직면한 환경을 소극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제 1단계에서 시작하여, 직업안정, 주위와의 친화감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새로운 삶에 대응하는 제 2단계를 거쳐, 경제적, 사회적인 자립 생활 및 심리적 안정과 혼인 등을 통해 조선 사회와 완전히 통합을 이뤄 가는 제 3단계의 발전상을 거쳤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성된 하멜의 표류기는 정치, 경제 주도의 표층 차원을 초월하여 ‘문화’라는 인간의 심층 차원에 주안점을 두고 당시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조선시대 서민들과의 친화감을 조장시켜 줄뿐만 아니라, 사료로서 그리고 민족학지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 정부의 표류민 정책과 하멜 일행 처리

[사진] 김석근(국학연구원)


 하멜 일행이 제주도 부근에 난파한 1653년, 17세기 중엽은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급격한 변화를 겪던 그런 시점이었다. 조선 정부는 박연(朴淵)을 파견하고 이들을 서울로 호송해 귀화한 남만인 정도로 여기고 훈련도감에 귀속시켰다.  하지만, 그들 중의 일부가 이른바 탈출사건을 일으키게 되고, 그들은 ‘감봉처분’과 더불어 전라도 지역에 유배당하게 된다. 1666년 9월, 하멜 일행은 치밀하게 준비한 끝에 마침내 탈출(세번째 탈출 시도)에 성공하게 되고 그들은 28일만에 귀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몇몇 잔류자들이 있었고, 이어 일본측이 개입하게 되었다. 일본과의 교섭에 있어서, 조선 정부는 사안이 '네던란드인 잔류자 8명 송환'이라는 걸 알았을 때, 조정에서는 그들을 지체 없이 넘겨주기로 결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vol.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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