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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일본에서 한국학 전문가가 되어 한일관계사<br> 바로잡기에 기여한 최서면 동문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3-04-16

최서면 동문(연희전문 정치 45년 입학)은 '안중근 의사'와 '독도'에 관한 연구를 비롯, 많은 자료를 발굴 연구해 한일관계사를 바로잡는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모교를 떠난지 56년만인 지난 2월 명예학위를 받았다. 최 동문은 1957년 도일, 1969년 동경 한국연구원을 설립해 1988년까지 30여년간 제 조선총독부 시대의 문헌이나 안중근 의사 관련 자료, 서양인이 제작한 한국지도 등 근대 한일관계 자료를 수집, 연구해 왔다. 1988년 귀국한 그는 서울에 국제한국연구원을 설립해 희귀자료 20만여 점을 체계 있게 보관하는 등 한국학 연구에 몰두하다가 지난해 원장직에서 물러났다. 요즘에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한·일·서양의 지도에 나타난 한반도 연구 등 정치지리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모교를 떠난 지 50여년만인 지난 2월 명예졸업장을 받으셨습니다. 소감은
성경을 비롯한 많은 고전들을 보면 방탕의 길을 갔다가 돌아온 탕아를 반겨 주는 부모의 모습이 있습니다. 마치 집을 나간 탕아와 같았던 저를 56년만에 모교에서 기꺼이 불러주시고 연세대 졸업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또한 저도 연세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확인해주시니 너무도 감격스럽습니다.
동시에 많은 젊은 선배를 갖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비록 나이는 많지만 저는 2003년도 졸업생입니다. 그러니 저보다 일찍 졸업한 연세인들은 모두 저의 선배 아니겠습니까.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서 투옥되셨고, 그로 인해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은 크게 둘로 나뉘어있었습니다. 그 한 부류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학생들이었고, 다른 한 부류는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민족주의 진영 내에서도 이승만 박사를 지지하는 학생단체와 김구 선생을 지지하는 학생단체의 두 부류의 주류가 있었습니다. 연희전문 재학시절의 저는 백범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국독립당 산하 대한학생연맹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 박사를 지지하는 진영에서 보기에는 김구 선생을 지지하는 진영이 가까운 정적이었습니다. 때문에 김구 선생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당시 대한학생연맹의 위원장이었던 저도 그 대표적인 희생자입니다.  1948년 "미군정포고령2호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1년 6개월을 선고받게 됐고 그로 인해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주 : 1947년 12월 2일 외교부장ㆍ정치부장을 역임한 장덕수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동기들이 졸업을 하던 날 당시 총장이었던 백낙준 박사와 이한신 교목과 함께 형무소에 찾아와서 "네가 졸업생 중에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으로는 네가 졸업한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해 가슴이 뭉클했던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일본행을 택하게 됐습니까
형무소에서 저는 천주교 신자가 됐습니다. 출옥 후에 천주교 노기남 대주교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고, 당시 천주교신자였던 장면 박사도 만났습니다. 장면씨와 인연을 맺게 됐던 당시 저는 천주교 총무원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고 장면씨는 천주교 서울교구 사무총장이었습니다. 장면 박사는 부통령이라는 직위에 있으면서도 국가행사에 초대받지 못할 정도로 천대받은 부통령이었습니다. 부통령이 대통령과 함께 국가의 대사를 상의하지 못하고 정치적 견제의 역할만을 담당했다는 것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부통령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유당 정권의 미움을 사 더 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어서 1957년 밀항을 통해 일본에 망명하게 됐습니다.

도일 후에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일본 망명 후에는 한국학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사실 처음 도일 때는 이탈리아 로마에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행을 준비하던 중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으면서 인생 계획이 다시한번 전환된 것입니다. 자료실에 있는 한국관련 논문과 자료들을 보면서 너무도 놀랐습니다. 일본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알고있는 것보다도 내가 내조국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등골이 차가워졌습니다. 한국 역사를 하나도 모르는 내가 무슨 한국사람인가. 국적만 한국인이지 머릿속은 전혀 한국사람이라 볼 수도 없다고 느꼈습니다. 매일 매일 공부할수록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때부터 5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본 국회도서관 아시아 자료실에서 책 속에 묻혀 살았습니다.
그 결과 일본 아시아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었고, 교수로 재직하면서 일본인 학자 및 언론계 인사들과 한일관계사를 공동 연구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한일양국 교류에도 힘썼습니다. 또 1969년부터는 동경에 한국연구원을 설립해 일본에서 한국학을 연구했습니다.


'한일외교의 괴물'이라고 불렸던 최서면. 광복 직후의 격동기에 김구, 장면 등 당대의 거물들과 교분을 가졌고, 일본에서는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수상 등과 시이나 에쓰사부로 전 외상 같은 당대의 내로라 하는 정객들과 사귀었다. 자유당 시절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한국학 전문가가 되어 한일외교 및 한일관계사 바로잡기에 나선다.

 

연세대와 일본의 관계에도 많은 노력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현재는 자유롭게 한일간 교류가 가능하지만 국교정상화 이전에는 한일간 학문이나 문화의 교류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학계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연구기관과의 연계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금 활발하게 교류를 하고 있는 연세-게이오의 결연을 주선한 것도 바로 접니다. 또한 한국에서 유학한 최초의 일본사람인 오꼬노기라는 한국학자도 연세를 거쳐가도록 도왔습니다.

연세와 일본의 교류에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전후 일본의 발전에 큰 공로가 있는 수상인 기시 노부시께 수상이 연세대에서 명예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물론 우리나라에서 명예학위를 받은 외국사람이 많지만, 일본의 수상이 일본을 최고로 비판한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정부에서 기시 수상에게 명예학위를 주겠다고 했을 때 기시 수상이 연세대에서 받고싶다고 자청했습니다. 미래의 한일관계는 과거극복에 있다고 판단하고, 과거 극복을 위해서는 한국 최고의 반일대학에서 용서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기시 수상은 한국과 가까이 지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고 했습니다.
명예졸업장을 수여할 때 교목이 축도 드렸던 내용은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때 교목은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하나님 우리는 어찌하란 말씀이십니까. 어느 때는 이들과 싸우라고 하시더니, 이제는 명예학위를 주라고 하십니까. 하나님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라고 하시니 따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이 굴욕을 참습니다."라고 말해 행사장을 숙연하게 했습니다.

최근에는 어떤 연구를 하고 계십니까
최근에는 독도 관련 문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자료를 가지고 주장하기보다는 상대방인 일본의 자료를 가지고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독도문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역사상 누가 더 먼저 독도를 알고 관리하고 있었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와 관련한 자료를 발굴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연표로 정리하고 5월 중순에 연세대에서 발표할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독도문제, 동해표기문제 등과 같은 한·일간 대립의 문제들을 골라 연구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어떻게 하면 쌍방이 문제를 극복하고 한일친선을 구현할 수 있는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연세는 최 동문께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연희는 그 당시 한국대학 중에서 가장 선진적인 대학이었던 것으로 회고합니다. 캠퍼스 내에 서양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국제적인 감각을 배양할 수 있었습니다. '파란 눈도 사람이다'라는 것이 이미 우리에게는 상식인데,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외국인에게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관해 연구하면서도 연희 재학시절 배양된 감각이 기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인들만이 존경하는 안중근이 아니라 일본인들을 비롯한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안중근 연구가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국제적인 민족주의만이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제 학문의 기본 개념입니다. 일찍이 이러한 국제적 인식을 심어준 연희는 제 학문의 '출발점'이었고 결론을 만들어준 '기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모교에 오셔서 느끼신 점이 있다면
많은 학생과 좋은 시설들이 있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좋아 보이는 것은 제가 재학시절 있었던 건물들입니다. 6.25라는 엄청난 일을 겪고도 아직 이렇게 모교의 건물들이 잘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입니다. 과연 기적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실감케 합니다.

후배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세계 3대 성인을 고르라면 흔히들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를 꼽습니다. 이 세분의 공통점은 제자와 대화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직접 쓴 저서가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와의 대화록이 남아 그들을 성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제자들이 만든 위대한 인물인 것입니다.
대학생활에서 학생은 훌륭한 선생에게 '배울 수 있는 질문'을 잘 해야합니다. 그래야만 스승은 역사에 남을 대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연세인들이 스승을 스승답게 만들고, 제자를 제자답게 만드는 역할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vol.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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