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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연세 뉴스] 제중원 역사 바로 알기, 의과대학 여인석 교수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5-05-16




 

제중원 역사 바로 알기

의과대학 여인석 교수 (의사학과, 동은의학박물관장)

 

글 싣는 순서

1. 제중원 뿌리논쟁의 경과

2. 제중원 설립과 알렌의 역할

3. 제중원 국립병원설의 허구

4. 제중원과 세브란스 병원의 연속성

 

제중원 설립과 알렌의 역할 

제중원을 서울대병원의 역사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이 취하는 전략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처음 제중원이 정부의 기관으로 시작된 것은 사실이므로 이를 최초의 국립병원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근거로 서울대병원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전략이다. 소위 국립병원설로 부를 수 있는 이 논리는 서울대병원의 핵심적 주장이다. 이 주장의 허구성에 대해서는 다음 회의 글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제중원에서 알렌을 비롯한 선교사들의 색깔을 지우려는 시도이다. 이 작업은 집요하게 이루어지는데, 이를 위해 다시 두 가지 논리가 동원된다. 하나는 조선정부가 원래 서양식병원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으므로 알렌이 없었어도 어차피 병원이 설립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중원 설립 과정에서 알렌의 역할은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알렌은 조선정부가 고용한 고용의사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따라서 제중원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조선정부라는 논리이다.

 

1. 제중원의 설립 과정

갑신정변의 와중에 심한 자상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된 민영익을 치료함으로써 왕실의 신임을 얻게 된 알렌은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우선 의사로서 국왕인 고종과 민비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또한 왕의 어머니인 조대비를 치료하기 위해 그 거처 안까지 들어간 것 역시 외국인, 그것도 남자 의사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처럼 조정의 신임을 얻고 자신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자 알렌은 자신감을 얻고 해외 선교에 나섰던 자신의 뜻을 펼칠 방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85년 1월 22일 미국 공사관 대리공사인 폴크를 통해 서양식 병원의 설립을 다음과 같이 조선정부에 건의하였다.

“조선정부가 만약 병원을 건설한다면, 저는 마땅히 최고책임자의 역할을 다할 것이며, 귀 정부가 제공하는 급여는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단지 몇 가지 요구되는 일이 있습니다. 첫째, 서울에 공기 좋고 청결한 가옥 한 채. 둘째, 병원 운용에 필요한 등촉 및 연료, 보조원, 간호사, 하인 등의 월급, 가난한 환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한 음식 등. 셋째, 각종 약재비 삼백원 정도 등. 조선정부가 이것들에 대해 허락할 뜻이 있다면, 저는 또한 의사 1명을 자비로 초청하겠으며, 6개월 후에는 이 병원에 근무하게 될 것입니다. 저와 그 의사는 조선정부로부터 급여를 받지 않겠습니다. 급여를 받지 않는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는 백성들을 돕기 위해 설립한 병원사(病院社, benevolent society)라는 조직이 있는데, 저와 그 의사는 그 조직에서 급여를 받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병원은 청나라의 베이징, 톈진, 상하이, 광둥 등과 다른 나라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 중 두 개의 병원은 리훙장 자신이 스스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서울에 병원을 건설하는 것이므로 이 병원은 조선정부의 병원이며, 백성들은 병이 생기면 삼가 몸을 살필 수 있으니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조선의 대군주께서 만약 동의해주신다면 흔쾌히 처리될 거라 생각합니다.”

(알렌의 「조선정부 경중건설병원절론」 중에서)

알렌은 이 건의문에서 조선정부가 병원 건물과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부담하면, 자신은 미국의 자선단체에서 급여와 생활비를 지원 받으며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알렌의 병원설립계획은 당시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묄렌도르프의 방해를 받았다. 이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고종의 계속적인 호의와 지지에 힘입어 병원설립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알렌 스스로도 병원설립안이 예상보다 훨씬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서양식 병원을 원했던 조선정부는 병원설립안의 협의를 위해 1월 27일 관리 두 사람을 알렌에게 보냈다. 그리고 2월 16일에 병원설립을 담당할 조선 측 대표로 김윤식을 임명하였다. 2월 18일 김윤식은 미국공사관을 방문하여 병원 건물로 현재의 헌법재판소 구내 북서쪽 부분인 재동 35번지에 해당하는 홍영식의 집이 선정되었다고 전해주었다. 이어서 1885년 4월 3일 외아문에서는 새로운 병원의 개원 사실을 공포했다. 포고문은 북부 재동에 미국인 의사가 진료하는 병원을 개설하였고, 진료비에 해당하는 약값이 무료이니 누구나 진료를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알렌은 미국 선교부에 필요한 약품과 의료 기구를 주문했고 4월 9일부터 환자를 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은 특별한 개원 의식 없이 4월 10일 개원했다. 고종은 1885년 4월 12일 병원의 명칭을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란 뜻으로 ‘광혜원(廣惠院, House of Extended Grace)이라 붙였다. 하지만 4월 26일 ‘사람을 구하는 집’이란 의미의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으로 개칭하였다.

 

2. 조선정부는 병원을 설립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병원설립의 과정은 알렌이 주도했다. 알렌은 조선정부에 보낸 제안서에서 병원으로 사용할 건물 하나와 약간의 운영비만 지원한다면 자신은 무료로 그 병원에서 봉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알렌의 제안을 조선정부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개항 이후 조선정부는 서양의 문물을 도입할 의사를 갖고 있었다. 서양의학의 도입도 그 중에 하나였다.

의학의 경우도 서양의학 도입의 필요성은 논의되었지만 그것을 조선정부가 일본처럼 주도적으로 실현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재정의 부족 때문이었다. 서양의학 도입의 의사는 있으되 그 의사를 실현할 재원이 없는 상태, 그것이 바로 알렌의 제안 당시 조선정부가 처해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차에 알렌의 제안은 정말 매력적인 것이었다. 초빙을 하지도 않은 서양의사가 제 발로 조선에 찾아와서 건물과 운영비만 지원하면 무료도 진료를 하겠다니 조선정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알렌의 제안 이후 병원 설립이 알렌도 놀랄 정도로 빨리 진행될 수 있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3. 서울대병원의 역사인식이 가지는 문제점

제중원 설립 과정에서 알렌의 제안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병원은 알렌이 없었더라도 언젠가 병원은 설립되었을 것이므로 제중원 설립과정에서 알렌의 역할을 별것이 아니고 무시해도 좋다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주장은 학문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우선 이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정을 근거로 실제로 이루어진 사실의 의미를 폄훼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역사는 실제로 이루어진 사실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학문이지 이루어지지 않은 가정을 토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소설이 아니다. 지금도 일제의 지배가 지속된다는 가정 하에 쓴 가상소설이 있었다. 이처럼 실현되지 않은 가정 아래 쓰여진 글을 소설이라고 하지 역사라고 하지는 않는다. 서울대병원은 제중원에 관한 역사가 아니라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것 같다.

 

4. 알렌은 조선정부의 고용의사였나

알렌을 제중원의 역사에서 지우거나 최소한 그 의미를 축소시키기 위해 서울대병원이 내세우는 또 하나의 주장은 알렌을 비롯한 선교의사들이 조선정부에 의해 고용된 의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일반적으로 갑과 을의 고용관계에서는 계약서가 필요하고, 계약서에는 계약기간, 보수, 계약조건 등이 제시되기 마련이다. 실제로도 조선정부는 1899년 학부에서 설립한 의학교 교관으로 일본인을 고용한 적이 있는데, 그 계약서에는 위와 같은 계약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중원 의사들에게서 이러한 계약서와 계약내용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더군다나 병원설립을 직접 제안한 알렌에게 고종이나 조선정부가 계약관계를 요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 조선정부가 제중원에서 일하는 선교사와의 관계에서 뭔가 불만스런 내용이 있을 경우, 그것을 해당 선교사에게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미국 공사관을 통해 전달하였다. 만약 서울대병원의 주장처럼 알렌이 조선정부의 고용의사에 불과했다면 본인에게 직접 말하거나 통보하면 되지 미국 공사관을 통해 조선정부의 의사를 전달하는 복잡한 방법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제중원이 사실상 온전한 조선정부의 병원이 아니라 미국과의 외교 관계 속에서 실제로 의료를 담당했던 미 북장로교 선교부와의 동거 속에서 운영되었던 일종의 합자병원이었음을 말해준다.

 

5. 알렌은 조선정부로부터 월급을 받았나

서울대병원에서는 알렌이 조선정부로부터 신수비를 받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알렌이 조선정부의 고용의사였다는 주장을 편다. 신수(薪水)란 땔감과 음료를 지칭하는 것으로 신수비란 월급, 생활비, 보조금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알렌은 1887년 1월부터 13개월 동안 매달 50원의 신수비를 받은 전례가 있다. 1886년 근대교육을 위해 설립한 육영공원의 교사 월급이 160원이었던 것에 비해 1/3에도 미치는 못하는 액수였다. 만약 알렌이 받은 돈이 제중원에서 일한 것에 대한 월급이라면 왜 의사의 월급이 교사 월급의 1/3에도 미치지 못하는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해 서울대병원은 아직까지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50원도 당시 조선의 형편에서는 많은 돈이었다는 정도의 설명만을 내어놓는 형편이다.

먼저 알렌이 받은 신수비의 액수를 볼 때 이 돈은 제중원 근무에 대한 월급이라기보다는 조선정부가 알렌의 활동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지급하는 일종의 사례금의 성격을 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알렌은 자신이 받은 신수비의 성격을 밝힌 바 있다. 알렌은 귀국 후 출판한 책 Thing Korean(1908)에서 자신이 조선정부로부터 받은 돈은 국왕의 어의로서 일한 것에 대한 사례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어의는 상근직이 아니어서 궁궐에서 요청이 있을 때만 들어갔다.

알렌뿐 아니라 헤론과 에비슨이 신수비를 받은 것도 어의로서의 수고에 대한 보수였고, 비상근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적은 50원을 받았을 것이다. 알렌은 처음 그의 제안대로 제중원에서는 무료로 봉사를 했다. 따라서 어의로서의 수고에 대한 대가를 제중원 근무에 대한 월급으로 간주하고, 이를 근거로 알렌이 정부의 고용의사에 불과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vol. 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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