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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Academia] 6·25전쟁과 연세인, 김명섭 교수(정치외교학과)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5-02-16

 

6·25전쟁과 연세인

김명섭 교수(정치외교학과)

 

1885년 연세의 모태가 된 광혜원 개원은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과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연희와 세브란스는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의 충돌과 융합의 최전선에서 탄생했고, 한국근현대 정치사의 흐름 속에는 연세인들의 역사가 나선형적으로 얽혀져 있다. 1960년 4.19혁명은 최정규(의학)의 희생과 얽혀져 있었다.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는 김동길, 김찬국 등의 교수와 김영준, 김학민 등의 학생들이 치룬 옥고와 결부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치사의 흐름은 1987년 이한열(경영), 그리고 1996년 노수석(법학)의 희생으로 이어져왔다. 한국현대사 최대사건인 6.25전쟁(1950-53) 역시 연세인들의 역사와 맞물려 있었다.

6.25전쟁 개전을 1년여 앞둔 1949년 3월 17일 교내 언더우드 사택(현재 생활과학대학 뒤편 언더우드기념관)에서는 6.25전쟁의 서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참극이 발생했다. 1948년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총회에서 장면, 조병옥(연희 교수 역임), 정일형(문과, 27년 졸업) 등과 함께 대한민국 승인외교에 성공하고 돌아온 모윤숙을 연희대 교수부인회가 초청한 자리에서 언더우드 부인(Ethel Van Wagoner Underwood)이 피살당한 것이다. 이 사건을 주도한 청년들 중에는 제적생들과 재학생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관련자들 중 한 명인 배경환(裵庚煥, 당시 21세)은 6.25전쟁 중 월북하여,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어 1963년 4월 11일 사형에 처해졌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한국군에 자원입대했던 연희의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 중 조창호(교육, 50년 입학)는 1951년 중국인민지원군의 포로가 되어 조선인민군에 강제, 편입되어 고초를 겪다가 43년 만인 1994년 탈북에 성공했다.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한 그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방문했고, 1995년 연세대 졸업식장에서 명예졸업장이 수여되었다. 그의 귀환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이후 평양정권이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한국군 포로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

언더우드가 키운 김규식의 제자였고, 연희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던 조병옥은 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어 대구 방어전에 앞장섰다. 정일형은 1950년 6.25전쟁 직전 제2대 국회에 진출하여 국회외무위원장으로 활동했고(이후 8선),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한통신사를 창립, 사장에 취임했다. 이묘묵(李卯默, 문과, 22년 졸업)은 1951년 파리에게 개최된 제6차 유엔총회에 참석해서 한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6.25전쟁 당시 포병단장이었던 김계원(상과, 42년 입학)은 1951년 제2대 포병학교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제18대 육군참모총장(1966-1969)에 이어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다. 역시 6.25전쟁 중 참전했던 김운용(정치외교, 49년 입학)은 ‘육군본부 국제연합 연락장교단’에 근무하면서 쌓은 국제적 경험을 기초로 세계태권도연맹 창립회장과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어 한국 스포츠외교의 선구자가 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과 한국군은 서울 수복을 앞두고 현재 신촌캠퍼스 인근에서 서울을 방어하던 조선인민군과 교전했다. 당시 연희고지, 안산, 그리고 신촌교정 등지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의 모습은 현재 언더우드 동상의 기단석에 남아 있는 총탄자국이 말해준다. 이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이 탈취했던 학교 깃발들 중 하나(1941년 제작)를 미군 해병대 소대장 레이 르 피버(Ray Le Fever)가 되찾았다. 르 피버가 보존하고 있던 이 깃발은 2011년 연세대학교에 반환되었다.

깃발은 돌아왔지만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6.25전쟁 초기 조선인민군은 주요 인사들을 ‘모시기 작전’이라는 명목으로 억류하고, 납북했다. 이들 중에는 언더우드가 키우고 우리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던 김규식, 연희에서 가르친 국학자이자 1948년 대한민국 초대 감찰위원장을 지낸 정인보(교내 위당관은 그의 호를 딴 것), 상경대학장을 역임했고, 농지개혁법안의 초안을 마련했던 이순탁, 연희 교수를 지내고 제2대 서울대 총장을 역임한 이춘호, 평택 동아의원장으로 있던 최용준(崔容俊, 의학) 등을 납북했다. 이들은 정전회담 중에 ‘실향사민’(displaced civilians)이라고도 불리며 귀환조치가 논의되었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한국군은 10월 1일(현재 국군의 날) 38선을 넘어 북진했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었다. 1950년 12월에 전개된 흥남철수작전에서 공산주의 치하를 벗어나고자 했던 약 9만 8천명의 피난민들이 유엔군 및 한국군과 함께 퇴각할 수 있었던 데는 알몬드 미 10군단장을 설득한 현봉학(의학, 44년 졸업)의 노력이 있었다. 그는 세브란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버지니아 의대에 유학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참전했는데, 알몬드 군단장의 고향도 버지니아였다. 알몬드 10군단장은 현봉학이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하늘의 뜻이 아니었을까 라고 회고했다.

연희대 총장에 이어 6.25전쟁 발발 당시 문교부장관이었던 백낙준의 주도로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부산, 대구, 전주, 대전에 전시연합대학이 설치되었고, 연희와 세브란스는 모두 전시연합대학에 편입되었다. 1926년부터 1938년까지 연희 교수를 역임하고, 6.25전쟁 이전 문교부 편수국장을 맡았던 최현배는 전쟁 중이던 1951년에도 편수국장을 맡아 교과서 제작 및 공급을 담당함으로써 국민교육에 이바지했다.

6.25전쟁 중에 전개된 사상전과 정신적 황폐함 속에서 연세가 배출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전투적 반종교주의’이기도 했던 공산주의와의 사상적 전투를 이겨내는데 기여했다. 6.25전쟁 중에는 군종제도가 만들어져 신학과 학생들이 성직자로서 군복무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전남도지사를 지냈던 최영욱(의학)은 조선인민군에 의해 수감되어 있던 중 옥사했는데, 그의 부인이자 김규식의 처제였던 김필례는 한국 여전도회와 YWCA운동 지도자로서 기여했다. 1968년 1.21사태 당시 청와대 습격 위해 평양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원들을 막아섰다가 순국한 최규식 경무관은 연희에서 신학을 공부하다 중퇴하고 6.25전쟁에 참전했었다. 현재 그의 동상은 자하문 고개에 세워져 있다.

세브란스 역시 6.25전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3.1운동 당시 33인 민족대표 중 최연소였고, 최후까지 생존했던 세브란스 출신 이갑성(李甲成, 1886-1981)은 6.25 전쟁 당시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6.25전쟁 초기 서울역 앞에 있던 세브란스병원의 시설과 건물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징발되어 ‘조선인민군 제1후방병원’으로 쓰였다. 거제도로 옮겨갔던 세브란스는 강원도 원주와 경상도 청도 등지에서도 전시 의료활동을 전개했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의료활동은 한국 의학계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세브란스병원은 미군대한원조사업(AFAK,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의 일환으로 미8군 기념병원(the 8th Army Memorial Hospital)이 되었다.

6.25전쟁 중 민광식(閔珖植, 37년 졸업), 정인희(38년 졸업), 이헌재(44년 졸업) 등 많은 세브란스 출신들이 군의관으로 활동하면서 생명을 보살폈다. 당시 의학도들이 군의관으로 활동하게 된 데는 1925년 영국에서 의사면허를 받고 1927년부터 세브란스에서 일하다가 6.25전쟁 발발 당시 육군 의무감으로 있던 윤치왕(尹致旺)의 영향이 컸다. 이들은 군의관으로 활동하면서 최첨단 의학기술을 습득하여 한국 의학발전에 기여했다. 박능말은 덴마크에서 파견된 병원선 유트란디아(Jutlandia) 호에서 마취의로 활동하며 마취의학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1950년 세브란스 간호학과 졸업예정이었던 김근화 동기생 45명 중 17명은 간호장교가 되어 부상자들을 간호했다. 6.25전쟁 중의 간호활동이란 목숨을 건 헌신이었다. 1950년 간호학과에 입학한 하영수 동기생 30명 중 졸업생은 8명에 불과했고, 22명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6.25전쟁 당시 반공포로 석방을 진두지휘했던 원용덕(元容德) 헌병사령관은 세브란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군의관 출신이었다. 그는 1953년 6월 18일 공산군 측이 제네바협정문에 근거해서 전원송환을 요구하고 있던 반공포로들을 전격적으로 석방했다. 그의 휘하에 있던 한국헌병들은 미군이 경비 중이던 수용소들의 전원을 끊고 철조망을 뚫었고, 반공포로들을 포로수용소로부터 탈출시킴으로써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6.25 전쟁 당시 반공포로 경험을 했던 시인 김수영도 동경상대를 거쳐 연희에서 공부한 바 있다. 그는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 풀과 같은 이 땅의 민초들을 노래했다.

6.25전쟁의 광기를 봉인하기 위한 정전회담에서 언더우드가(家)의 형제들은 유엔군 측의 문서번역 및 통역을 맡았다. 당시 회담에 참가했던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들 중 한 명은 통역으로 일했던 언더우드 형제들 중 한 명이 “자기 일상생활에 몹시 엄격한 데가 있어 장시간 긴장해서 통역하는 동안 담배를 피울 때마다 자기 일기장에다 몇 시 몇 분에 피웠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엄밀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들이 남긴 정전회담의 기록은 귀중한 사료로 남아 있으며, 번역노트는 교내 언더우드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공산군 측에서 번역과 통역을 맡았던 인물은 연희전문 문과에서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一漢, 1917-2004)에게서 배웠고, 1937년 최우등으로 졸업했던 설정식(薛貞植, 1912-1953?)이었다. 설정식은 1947년 곽복산이 설립하고 백낙준이 후원했던 조선신문학원(후에 서울신문학원)의 강사로도 활동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정전회담 도중 설정식은 갑자기 사라졌다. 같은 연희 출신으로서 광복 이후 창간된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편집인 겸 주간을 지냈고, 월북 후 문화선전성 부상이 되었던 조일명(趙一明, 1903-1953년?, 일명 趙斗元) 등과 함께 박헌영 파로 몰려 숙청당했던 것이다. 설정식의 연문 후배였던 김상훈(41년 문과 입학)은 좌익에서 전향하여 국민보도연맹에 참여했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인민군에 가담했고, 이후 이북에 남아 설정식이나 조일명 등이 숙청당한 후에도 오랫동안 집필활동을 계속했다.

6.25전쟁의 역사적 상처를 진정으로 극복하는 길은 ‘망각을 통한 화해’가 아니라 ‘기억을 통한 화해’이다. 세상을 이끄는 명문대학들은 학교는 물론 나라와 세상을 위해 헌신했던 동문과 선생들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이 글에서 언급된 연세인들의 삶과 죽음, 미처 언급되지 못한 연세인들의 발자취에 대한 지속적인 추적이 필요하다.

글_김명섭 교수(정치외교학과)

 

vol. 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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