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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Academia] 현미경으로 본 인간의 조건 (Ⅰ), 시스템생물학과 김응빈 교수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4-10-16

 

현미경으로 본 인간의 조건 (Ⅰ)

시스템생물학과 김응빈 교수

 

이야기를 시작하며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 가운데 하나다. 서양 문화의 밑바탕이 되는 그리스 신화에도 이 욕망을 억누르지 못해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는 두 주인공이 있다. 저승에까지 가서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찾은 오르페우스는 지상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뒤따라오는 아내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데스의 명을 어긴 탓에 안타깝게도 아내를 잃고 만다. 프시케는 또 어떤가? 자신의 얼굴을 보려하면 영원히 헤어지고 말 것이라는 연인 큐피드의 충고를 단 한 번 어겼다가 큐피드와의 이별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고도의 문명을 발전시켜온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예컨대 미생물학은 너무 작아서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려고 했던 욕망 덕분에 탄생한 학문 분야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현미경이 있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작은 세상을 확대해서 보여 주는 이 기구를 통해 색다른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려고 한다. 좀 과하지 않나 싶은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약간 별난 미생물학자의 주장을 끝까지 들어보시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아주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곱씹어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생각거리는 그야말로 풍부하다. 왜냐면 사실 이 답을 찾기 위해서 지난 2,500여 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이 골몰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벽한 답은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욕망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레벤후크(Anton van Leeuwenhoek, 1632~1723)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10대 중반에 포목상에서 도제 생활을 했고, 이때 유리를 입으로 불어 기구를 만드는 기술도 배웠다. 20대 초반에 고향인 네덜란드의 델프트(Delft)로 돌아와 직물 장사를 시작하며 비단 상인의 딸과 결혼하게 되면서 안정된 삶이 시작되는 듯하였으나, 안타깝게도 5명의 자녀 중 4명을 어린 나이에 잃고 아내마저 그가 34세가 되던 1666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사랑하던 이들과의 이별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떠났던 것이었을까? 그 이유야 어쨌든 단 한 번 다녀온 1668년의 영국 여행이 레벤후크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영국에서 그 당시 베스트셀러인 「마이크로그라피아」(그림 1)를 접하고는 현미경을 통해서 본 미시 세계에 푹 빠지게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레벤후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렌즈 제작에 몰두하였다.

현미경을 처음 만든 사람은 안경 제작자였던 네덜란드의 얀센(Zaccharias Janssen, 1585~1632)이다. 그는 1600년경에 렌즈 두 개를 둥근 통에 고정시켜 현미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복합현미경은 품질이 좋지 않아서 세균을 비롯한 작은 미생물을 관찰하는 데에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 당시의 대다수 과학자들은 작은 곤충이나 나뭇잎과 같이 잘 알려진 것들을 확대해서 보는 데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벤후크는 더 작은 것을 보고 싶었다. 예를 들어 매운 고추를 먹었을 때 혓바닥이 따가운 이유는 고추에 들어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날카롭고 뾰족한 물질이 혀를 찌르기 때문일 것이라는 다소 어린아이와 같은 상상을 하고 고추 즙을 내어 이것을 현미경으로 보고자 하였다.

레벤후크는 직물을 거래할 때, 돋보기를 사용하여 재질을 검사하곤 했기 때문에 렌즈에 친숙했었고, 장사를 하면서도 렌즈와 금속의 정밀 가공 기술을 틈틈이 익혀 왔었다. 레벤후크는 자신의 탁월한 렌즈 연마 기술을 발휘하여 300배 정도까지 확대해서 볼 수 있는 렌즈를 만들고 이를 이용하여 현미경을 만들었는데, 겉모습만 보면 현미경보다는 돋보기에 가까워 보인다 (그림 2). 레벤후크는 자신이 만든 확대 렌즈를 통해 후크가 보았던 세포보다 10배는 더 작은 살아 있는 생물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완벽을 추구했던 레벤후크는 현미경 렌즈에 잡힌 이 작은 생물들을 화가들의 도움을 받아 정밀하게 묘사했고 이를 ‘극미동물(animalcule)’이라고 불렀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가 레벤후크의 동갑내기 동네 친구였다고 한다.

1673년부터 1723년까지 50년에 걸쳐 레벤후크는 빗물과 자신의 대변, 노인의 치아에서 긁어낸 찌꺼기 등에서 발견한 극미동물의 자세한 그림에 설명을 덧붙여 런던 왕립학회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영국 왕립학회는 레벤후크라는 아마추어의 발견이 사실인 지를 놓고 논란에 휩싸였다. 결국 최종 확인은 다름 아닌 로버트 후크가 맡았고 그는 레벤후크의 발견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1680년 영국 왕립학회는 정규 학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레벤후크를 회원으로 추대했다.

 

어떤 논쟁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미시 생물의 세계가 발견된 후, 사람들은 이들의 기원에 대해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19세기 후반까지도 보통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철학자와 심지어 일부 과학자들까지도 생명의 어떤 형태는 무생물에서 저절로 우연하게 생겨난다고 믿었고, 이 과정을 ‘자연발생(spontaneous generation)’이라고 그럴싸하게 불렀다. 쉽게 말해서 200여 년 전 만해도 사람들이 생쥐까지도 저절로 탄생할 수 있다고 흔히 믿었고,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쌓아둔 퇴비에 서 파리가 나오고 구더기는 썩어가는 동물의 사체에서 항상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게다가 생물학의 시조로 여겨지는 아리스토텔레스도 무척추동물뿐만 아니라 고등 척추동물도 자연발생을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17세기 화학자이자 의사였던 벨기에의 헬몬트(Jan Baptist Van Helmont, 1579~1644)는 쥐를 만드는 방법을 남기기까지 했으니, 당시에 자연발생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은 이상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1668년 이탈리아의 의사인 레디(Francesco Redi, 1626~1697)가 최초로 자연발생에 대한 의문을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그는 구더기가 썩은 고기에서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로 결심하고, 두 개의 단지에 고기를 담았다. 하나는 뚜껑을 덮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단단히 밀봉을 하였다. 예상한 대로 열린 단지의 고기에서만 구더기가 나왔다. 자연발생을 믿는 사람들은 신선한 공기가 없어서 그렇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레디는 두 번째 실험을 했는데, 이번에는 밀봉 대신 가제로 단지를 덮었다. 공기가 공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더기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파리가 고기에 알을 남길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레디의 실험 결과는 생물이 저절로 생겨난다는 오랜 신념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당시의 많은 학자들은 여전히 레벤후크가 발견한 극미동물, 즉 지금은 미생물이라고 부르는 작고 간단한 생물은 무생물 물질에서 발생할 만큼 충분히 단순하다고 믿었다. 그런 와중에 1745년 영국인 니담(John Needham, 1713~1781)이 고깃국을 끓인 다음에 용기에 담아 뚜껑을 닫아도 국물이 곧 미생물로 가득해지는 것을 발견하고, 고깃국에서 저절로 미생물이 나왔다고 주장했다. 자연발생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강화되는 듯하였다.

이로부터 약 20년 후 이탈리아의 스팔란자니(Lazzaro Spallanzani, 1729~1799)는 니담이 국물을 끓인 다음에 공기에서 미생물이 들어갔을 것이라고 하였다. 스팔란자니는 밀봉한 상태로 끓인 고깃국에서는 미생물이 생기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 니담은 끓이는 과정에서 자연발생에 필요한 생명력(vital force)이 파괴되었는데, 밀봉 때문에 공기에서 이것이 보충되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스팔란자니의 실험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라부아지(Anton Laurent Lavoisier, 1743~1794)가 생물의 생명 유지에 산소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이 보이지 않는 생명력은 더욱 신빙성을 얻었고 그렇게 논쟁은 계속되었다.

 

논쟁의 종결자

1668년 레디의 실험으로 시작되어 190년 동안이나 계속된 자연발생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 사람은, 1858년에 살아 있는 세포는 살아 있는 기존의 세포에서만 생길 수 있다는 ‘생물속생(biogenesis)’을 주장한 독일의 피르호(Rudolf Virchow, 1821~1902)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피르호는 생물속생 개념을 설명할 수 있는 실험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또다시 3년이 지나갔다. 드디어 1861년에 프랑스의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가 마침내 자연발생 논쟁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냈다. 지금으로서는 허무맹랑한 자연발생설 논쟁이 끝나는 데에 무려 200년에서 불과 7년이 모자라는 시간이 걸렸다. 생각해 보면, 2천년 이상 뿌리를 깊게 내렸던 고정 관념을 깨는 데 걸린 시간 치고는 그렇게 오래 걸린 것도 아니다.

파스퇴르는 간단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로 생명력의 부재라는 지적을 앞세워 공격해오는 자연발생설 옹호자들이 고개를 숙이게 했다. 파스퇴르는 공기 중에 수많은 미생물이 존재하고 이들이 멸균된 용액에 들어와 증식을 하는 것이지, 공기 그 자체가 미생물을 생성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파스퇴르는 먼저 보통 플라스크에 고깃국을 채워 끓인 다음, 일부는 열어둔 채로 다른 일부는 뚜껑을 덮어 식도록 놔두었다. 며칠이 지나자 뚜껑을 덮지 않은 플라스크에서는 미생물이 자랐지만, 입구를 막은 플라스크에는 미생물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이렇게 스팔란자니의 실험을 재현에 성공함으로써 공기에 있는 미생물이 고깃국을 오염시키는 주범이라는 확신을 갖게된 파스퇴르는 목이 긴 플라스크에 고기국물을 넣고 목을 S자 모양으로 구부렸다. 그러고 나서 이 플라스크에 있는 내용물을 끓였다 식혔다. 플라스크에 있는 고깃국에서는 몇 달이 지나도 아무런 생명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그림 4).

파스퇴르의 독창적인 실험 장치의 핵심은, 생명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공기는 플라스크로 자유롭게 들어가지만, 공기 중 미생물은 구부러진 목 부위를 넘어갈 수 없게 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공기는 확산되지만 미생물은 중력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찮아 보이는 미생물조차도 생명력과 같은 신비로운 힘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님이 명확해졌다.

자연발생설을 사멸시킨 파스퇴르의 연구를 시작으로 이후 50여 년에 걸쳐 미생물에 대한 중요한 발견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이 기간을 ‘미생물학의 황금기’라고도 한다). 그 중에서도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연 업적, 즉 질병과 병원체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단연코 눈길을 끈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다음호에 2부가 계속 연재됩니다>

 

 

vol. 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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