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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Impact Makers] 나누며 사는 삶, 돕는 즐거움에 매료되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4-02-22

나누며 사는 삶, 돕는 즐거움에 매료되다

국가 유공자에게 표하는 작은 예우, 중앙보훈병원 이근우 치과병원장(치의학 73)



치과 의사, 교수, 봉사자. 이근우 원장의 삶은 이 세 단어로 요약된다. 환자들에게는 더없이 따뜻한 의사로 지금도 여전히 신망이 높고, 우리 대학교 치과대학 교수 시절에는 치과대학장을 비롯해 주요 보직을 맡아 학교와 병원의 발전을 이끌었다. 국내외 무의촌을 찾아 어려운 이들에게 인술을 베푼 봉사 이력도 30년이 넘는다. 2020년, 정년 퇴임 후 중앙보훈병원 치과병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지금 남다른 사명감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한 고령의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보람찬 인생 2막을 위한 새로운 도전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자리 잡은 중앙보훈병원은 국가 유공자와 그 가족을 위해 설립된 공공 의료 기관이다. 1974년 종합 병원으로 개편된 후부터는 일반 진료도 병행한다. 이근우 원장이 이곳에 부임한 것은 2020년 7월, 정년 퇴임 직후였다.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어요. 퇴임하고 나면 그동안 해 왔던 개발 도상국 의료 봉사를 계속 이어갈 생각이었죠. 우연히 중앙보훈병원 치과병원장직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어떤 병원인지 한번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국가 유공자들을 치료하는 곳이더라고요. ‘이렇게 좋은 취지로 설립된 병원이라면 뭔가 내 역할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소개서 작성에서부터 면접까지, 일반적인 채용 절차를 모두 거쳤습니다. 학교에서 늘 면접관 역할을 하다 면접을 ‘당하는’ 상황이 되니 무척 어색하더라고요(웃음). 면접관의 마지막 질문이 급여에 관한 것이었는데, ‘월급이 적어서 실망하실 것 같다’며 미안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괜찮다’고 말했죠.”


그 일이 가진 가치와 의미가 선택의 기준이었던 그에게, 월급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앙보훈병원의 설립 목적에 공감했고,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일, 그다운 결정이었다.



쾌적한 공간,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당연한 예우


시설 노후화가 심각했던 중앙보훈병원 치과병원은 당시 병원 증축을 추진 중이었다. 그는 부임과 함께 이 대형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이런저런 사유로 6개월이나 공사가 지연되면서 마음고생도 컸지만 지난해 12월 마침내 완공돼 지하 4층·지상 5층의 초현대식 건물로 재탄생했다.


새 병원은 전체 면적이 이전에 비해 5배나 넓어졌고, 9호선 중앙보훈병원역에서 바로 이어져 접근성도 높아졌다. 환자 치료용 ‘유닛 체어’가 60여 대에서 110대로 늘었고, 의료진도 100명이 넘어 어지간한 대학 병원 수준을 갖췄다. 특히 국내 치과 병원에서는 처음으로, 거동이 어려운 환자를 침대째 이동시켜 진료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고령 환자가 많다는 점을 고려한 ‘특수 시설’이다.


“공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막막했는데,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큰 문제 없이 마무리했어요. 임시로 사용하던 건물에서 이사할 때는, 직원들이 주말도 반납하고 모두 자발적으로 나와서 짐을 옮겼어요. 정말 감사하죠. 우리가 하는 일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 대한 예우라는 점이, 한마음으로 움직이게 한 동력인 것 같아요. 보훈병원을 찾는 국가 유공자들은 치아 건강뿐만 아니라 당뇨, 고혈압 등 복합적인 문제가 많아요. 신체적인 장애로 경제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해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분도 많고요. 그런 점에서 보훈병원은 고령의 유공자 중에서도 정말 어려운, 국가의 도움이 꼭 필요한 분들을 위해 특화된 곳입니다. 그동안 너무 낡고 협소해서 죄송스러운 마음이 컸는데, 이제 쾌적한 환경에서 모실 수 있게 돼 조금 편안합니다.”



치과대학장 시절, 글로벌 표준화 위해 CODA 인증 추진


우리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일 때도 그는 치과대학장, 보철과학교실 주임교수, 치과대학병원 진료부장 등을 역임하며 학교와 병원의 발전을 위해 애썼다. 특히 치과대학장을 맡았을 때는 CODA 인증을 위해 적극 나섰다.


CODA(Commission on Dental Accreditation)는 미국치과의사협회(ADA) 위탁 치의학 교육 총괄 인증 평가 기관이다. 이 기관의 인증을 받은 치과대학 졸업생만이 미국 치과 의사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CODA 인증은 그 자체로 글로벌 스탠더드 대학임을 의미한다.


교육·실습 과정 개편, 교수·학생 역량 향상, 교육·연구 시설 보완 등 CODA 인증 조건 충족을 위한 준비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 대학교가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해 교직원들을 독려했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하고 많았어요. 다들 고생을 많이 했죠. 예비 검사를 위해 5명의 평가단원이 학교를 방문했는데, 평가가 아주 좋았어요. 그러면서 보완할 점을 얘기해 주는데 그 작업이 역시 만만치 않겠더라고요. 그래서 이걸 보완해서 최종 평가까지 갈지, 중단할지를 결정하는 회의를 소집했어요. 고맙게도 거기 모인 교수들이 모두 ‘계속하자’고 해서 지금까지 이어졌어요. 올해 최종 인증을 위한 평가단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학교에 있을 때 했던 일 중 가장 기억에 남아요.”



2015년 ‘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행사 주관, 치과대학 역사 정리

그가 꼽는 또 하나의 보람 있는 일은, 2015년 주관한 ‘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행사다. 당시 치과대학장이었던 그는 10여 개국의 국제 석학들을 초청해 다양한 학술 대회와 행사를 개최했다. ‘100주년사’를 발간해 국내 치의학 발전을 이끌어 온 우리 대학교 치과대학의 업적을 재조명한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그보다 앞선 2004년, 보철과 주임교수였을 때는 ‘연세보철학 80주년’을 기념해 보철학 역사를 정리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 치의학이 학문으로 도입된 것은 우리 대학교 치과대학이 최초다. 1915년 미국 선교사이자 치과 의사였던 쉐플리(Scheifley) 박사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부임해 치과학교실을 개설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후 1924년에는 보철을 전공한 선교사 맥앤리스(McAnlis) 박사가 합류해 보철 및 수복 전문 치료를 시작했다. 치과대학은 이를 기념해 올 4월, ‘연세보철학 100주년’ 학술 대회를 개최한다.


“초기에는 보철학이 따로 나뉘어 있지 않았어요. 치의학 안에 다 포함돼 있었죠. 그러던 것이 1924년을 기점으로 보철을 전문 과목으로 분리했어요. 서양 치의학이 시작된 것도, 보철을 전문 과목으로 나눈 것도 우리 대학교가 처음이에요. 그 의미 있는 역사를 기리기 위해 후배들이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주임교수일 때 ‘보철학 80주년’ 행사를 했는데, 벌써 20년이 흘렀네요. 학교에 있을 때 운 좋게 중요한 시점에 주요 보직을 맡아 그때마다 여러 선후배, 동료와 뜻깊은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렀어요. 올해 행사도 잘 치러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저 후배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해 최선을 다해 답해 주는 정도로 돕고 있어요.”



두 선교사의 숭고한 삶이 곧 ‘연세 정신’

이처럼 학교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모교에 대한 자부심이 됐다. 또한 그는 지난해 발표된 QS 대학 평가에서 우리 대학교 치과대학이 국내 1위, 세계 28위를 차지한 것을 언급하며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우리 대학교 치과대학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고비 고비마다 수많은 사람의 땀과 눈물,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기에 모교의 역사는 늘 그를 숙연하게 만든다.

 


“저는 가끔 치과대학의 토대를 만든 두 분의 선교사님을 생각해요.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그 열악한 환경에서 치의학의 씨앗을 뿌린 그분들의 마음을요. ‘비행기도 없던 시절에 긴 항해를 견뎌야 하고, 한 번 가면 고향으로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할 수 없는, 그 멀고 험난한 길을 떠나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에 대해서도요.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헌신한, 그분들의 숭고한 삶과 정신이 면면히 전해져 우리 대학교의 오늘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그가 봉사에 남다른 열정을 기울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대내외 주요 직책을 맡아 바쁘게 일하면서도 봉사 활동은 중단하지 않았다. 기독학생회 지도 교수를 맡아 의대·치대·간호대 학생들과 함께 방학이면 국내 무의촌 진료를 다녔다. 중국, 몽골,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인도네시아 등 의료 시설이 열악한 나라에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개발도상국 의료 인력을 학교로 초청해 교육하는 연수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단발성 지원보다 교육을 통해 지속 가능한 기반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2018년에는 우리 대학교 봉사 부문 우수 교수상을 수상했다.


“해외 봉사를 떠날 때마다 비행깃값, 현지 체류비 등의 경비는 모두 사비로 충당했어요. 휴가, 안식년도 모두 봉사를 위해 썼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다녀왔어요. 주는 즐거움이 생각보다 크고, 제가 준 것보다 더 많은 걸 받는다는 걸 봉사를 하며 알게 됐죠.”



임플란트 분야 국내 손꼽히는 권위자


치과 의사로서 이룬 성취도 주목할 만하다. 보철 전공인 그는 임플란트 치료에 있어 국내 손꼽히는 전문가다. 임플란트 태동기였던 1990년, 우리나라에는 아직 시술 사례가 없던 때, 그는 미국·스웨덴·독일 등 임플란트 기술이 앞서 있던 나라들을 찾아다니며 연수를 받았다.


이후 돌아와 본격적인 시술을 시작했다. 치아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틀니를 대체할 새로운 기술로 각광받으면서 시장은 급속도로 확대됐다. 그 사이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명의’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의 진료만 고집하는 환자들도 많아졌다. 환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그들의 마음에 전해진 까닭이다.


“한번은 중앙보훈병원으로 오고 나서, 진료실로 낯익은 환자가 들어왔어요. 예전에 학교에 있을 때 치료해 드린 80대 어르신이었어요. 보행 보조기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걸음이 불편한데, 저를 만나려고 경기도에서 택시를 타고 오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옆에 있던 따님이 ‘엄마가 치과에 가야 하는데 꼭 선생님에게 치료받고 싶다고 애타게 찾으셔서,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중앙보훈병원 치과병원장에 취임했다는 기사가 있어서 모시고 왔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너무 반가웠어요. 그런데 멀리서 오셨다고 하니 마음이 편치는 않더라고요.”


이처럼 중앙보훈병원으로 그를 찾아오는 환자들이 지금은 제법 많아졌다. 환자와의 신뢰 관계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의술(醫術)보다는 인술(仁術)이 먼저라는 것을, 명의는 단순히 뛰어난 기술만을 가진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은퇴 후에는 본격적으로 봉사하며 살고 싶어


스무 살에 새내기로 시작해 정년 퇴임 때까지, 그의 삶의 무대는 오롯이 학교였다. 군의관으로 복무한 3년을 제외하면 한 번도 학교를 오래 떠난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의 추억도 그만큼 많다.


“학창 시절 6년 내내 치과대학 축구부에서 주전 선수로 뛰었어요. ‘전국 치과대학 체육대회’가 열리면 연습하느라 정신이 없었죠. 당시 연세대, 서울대, 경희대, 전국에 치과대학이 3곳밖에 없었어요. 한 번 지면 자동으로 꼴찌가 되니까(웃음), 죽기 살기로 했어요. 학교 끝나면 캐비닛에 가방 던져 넣고 바로 운동장으로 뛰어가고, 짜장면 한 그릇 먹고 밤늦게까지 뛰고, 또 다음날 수업하러 가고. 정말 재밌었어요.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치과대학 내 남성 중창단 활동을 하며 매년 공연 무대에도 섰다. 치과대학 기독학생회를 만든 사람도 그였다. 이처럼 무려 3개의 동아리를 동시에 참여하면서 학업도 소홀히 하지 않아 교수의 꿈을 이뤘다.


학부, 대학원, 교수로 이어진 삶의 여정에서 ‘연세’라는 이름은 늘 함께 있었다. 학교를 떠난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지금도 그는 매주 토요일이면 학교에 간다. 이제 막 진료를 보기 시작한 본과 4학년 학생들을 돕기 위해서다. 진료가 처음인 전공의들 곁을 지키며 치료와 관련해 실질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는 그는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다.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전공의들의 인사를 들을 때면, 보람을 느낀다.


“저는 누군가를 돕는 일이 진심으로 즐거워요. 은퇴하면 본격적으로 봉사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아직 특별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에요. 다만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는 길로 잘 따라가려고 합니다. 제 앞에 어떤 길이 열릴지 모르니,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요(웃음). 나눌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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