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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Impact Makers]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4-02-19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장애 학생들의 든든한 이정표,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김형수 사무총장(국어국문학 95)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형수 동문은 우리 대학교 재학 시절 장애인 인권 운동 동아리 ‘게르니카’를 만들었고 장애인교육권연대 사무국장을 비롯해 장애인의 권리와 소통을 위해 투신해 왔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인권 강사도 겸임하며 20여 년간 독보적인 장애인 교육권에 헌신한 공로로 ‘2020 한국장애인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차별 문제를 유쾌한 어조로 전하는 등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트리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고 있는 김형수 사무총장을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실에서 만났다.



장애 학생에 대한 지원을 끌어 내기 시작하다

김형수 사무총장은 1995학년도 대학 입시에 처음 생긴 ‘특수 교육 대상자 특별 전형 제도’로 우리 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장애인 차별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던 시절 특별 전형의 문을 연 대학은 4년제 대학 단 6개교에 불과했다. 우리 대학교는 1964년 지체 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 학교인 ‘연세대학교 재활학교’를 세웠고, 1993년 첫 시각 장애인 교수인 사회복지학과 이익섭 교수를 임용했다. 1995년 특별 전형 시행 첫해에 김 사무총장을 비롯해 스물두 명의 장애인이 입학했는데, 이때만 해도 교내에 장애 학생을 위한 편의 시설이 한참 부족했다.


“장애인 화장실은 백주년기념관에만 있었어요. 편의 시설 부족으로 우리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친구들이 학교를 상대로 싸워 주기도 했고, 강의를 듣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죠. 우리 과와 문과대는 장애인에 대한 감수성이 높았어요. 문과대 학생회가 학교 측에 요구해 경사로 공사를 이끌어 냈죠.”



1996년 심리학과에 입학한 시각 장애인 신입생이 자퇴한 사건을 계기로 김형수 사무총장은 장애인 학생을 위해 각성하게 됐다.


“신문으로 시각 장애인 신입생의 자퇴 소식을 알게 됐어요. 시각 장애인 후배가 입학했는데 점자 자료 하나 없이 여러 불편을 견디다가 자퇴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어요. 한 해 먼저 입학한 선배의 입장에서 ‘학교를 엎어 보자’는 마음으로 장애인 운동을 시작했죠.”


그가 나서면서 동료 학생들의 큰 지지가 일어났다. 총여학생회가 나서 줬고, 학생 운동을 하던 선후배들이 장애인 화장실 등 편의 시설 구비를 함께 고민해 줬다. ‘게르니카’라는 이름의 장애인 인권 운동 동아리를 조직해 2대 회장을 맡았다. 장애인 화장실과 공중전화 경사로 등 장애 학생을 위한 기본 시설을 마련하지 않고 특례 입학을 시행한 교육부와 학교의 무지함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연세적십자회, 사회복지학과 학생회 등과 연대한 김 사무총장은 1일 장애인 체험 행사를 펼쳤고 장애인 복지 문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풀어야 한다고 설득해 일반 학생 30여 명도 회원으로 참여시켰다. 게르니카는 장애 학생을 위한 교육 환경 조성을 촉구하고 장애인의 날 행사를 주최하는 등 학교 울타리를 넘어서는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김 사무총장의 노력으로 우리 대학교는 학생회관 시설물에 점자 안내판을 부착했고, 경사로가 없는 건물에 경사로를 설치하는 등 시설을 보완했다. 아울러 일본 장애인 운동 단체와도 교류를 추진하는 등 활동 영역을 국제 무대로 넓혔다.


“학회 활동에 열심이었고 연극도 하며 꽤 사교적으로 지냈어요. 협력해 주는 친구가 많았죠. 당시 학내 문화는 개인주의보다 집단이 함께하는 문화가 활발했는데 저희 국문과는 특히 더 공동체적이었고 제가 사랑을 많이 받았죠. 문과대는 장애 학생이 많았어요. 국문과 건너 사회학과에도 장애 학생이 있었고, 문화인류학과 조한혜정 교수님은 ‘너희는 왜 자기 권익을 위해 싸우지 않니? 싸워서 쟁취해’ 하며 우리를 지지해 주셨어요. 중증 장애로 그저 힘들어하는 우리의 의식을 깨워 주셨고, 게르니카의 열렬한 지원자가 돼 주셨어요.”



1996년 10월에 만든 게르니카는 다음 해 공식 동아리로 인정받았고 현재 학내 기구인 장애학생지원센터와 총학생회 장애인인권위원회 설립의 계기가 됐다. 김 사무총장의 활동은 학교 외부에서도 주목을 받으며 KBS 9시 뉴스에서 취재하기도 했다. 백양로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한 17초가량의 인터뷰가 나갔는데, 반응이 거세게 일어나며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환기가 됐다. 그는 장애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넓게는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으로 사회적 어려움을 겪는 자들로 국가가 지원해 줘야 할 대상을 뜻합니다. 다문화인으로 해당 국가의 언어를 못 하는 것과 발달 장애인이 언어를 못 하는 것 모두 장애인으로 등록하는 등 유엔과 유럽의 장애인의 범위는 훨씬 폭넓어요. 반면에 우리의 장애인 정의는 협소하죠. 의학적 정의만 따라 몸이 불편해야 장애인으로 인식해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장애인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불행하게 여깁니다. 장애 등록은 유용한 지원 제도인데 등록을 꺼려요. 우리나라 거리에서 장애인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예요. 장애인을 보는 인식도 문제고 휠체어로 이동하기가 여전히 불편해요. 요즘도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해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호소하고 있죠. 집에서 죽으나 지하철에서 죽으나 똑같다는 심정으로 싸우고 있어요.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만날 기회를 제공하고 함께 사는 세상을 배워야 해요.”



다름을 넘어 ‘당당한 인간 김형수’로

스스로 한계를 두지 않고 장애 학생들 지원에 앞장섰던 김 사무총장은 비장애인들과 다를 것 없이 자라 온 유년 시절 덕분에 주도적이고 당당한 성격을 갖게 됐다.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성장기를 보내면 상처가 많을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라고 강조한다. 독립적으로 자라도록 이끈 어머니 교육에 힘입어 자신감을 잃지 않고 컸다고 한다.


“태어나면서 뇌성 마비를 겪었어요. 안면 마비와 언어 장애는 없어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는 어려움이 별로 없었어요. 다섯 살 때 목발로 걷는 것을 배웠고, 보행이 불편하다 보니 소아마비로 오해받기도 했죠. 일반 학교에 다니면서 완전 통합 교육을 받았어요. 방황은 있었지만, 장애에 대해 방어하고 지지해 주는 친구들과 선생님 덕분에 사춘기를 잘 지나왔어요.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은 제 사진을 멋있게 찍어 주셨고, 중학교 선생님은 글짓기를 잘한다며 문학적 소양이 있다고 격려해 주셨어요. 고등학교 선생님은 앞으로는 컴퓨터로 글을 쓰는 시대니 손으로 못 써도 괜찮다고 용기를 주셨죠. 그런 좋은 해석과 반응 때문에 비장애인과 비교하거나 절망감에 시달리지 않고 인간 김형수로 생활해 왔어요.”



우리 대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부산에서 올라온 그에게 입학 합격증을 전달한 날이 2월 28일이었다. 기숙사는 이미 인원이 모두 찼다. 장애 학생을 받아 주는 하숙집은 없었다. 김 사무총장의 어머니는 당당하게 학생처를 찾아가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담당 직원이 방법이 없다고 거절하지 않았어요. 한참을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려 대학원생과 외국인 학생이 생활하는 국제학사에서 제가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줬죠. 그 직원분이 참 고마웠어요. 당시 우리 대학교에 장애 학생을 위한 시설과 지원은 부족했지만 감수성은 매우 수용적이었어요.”


어머니는 김 사무총장을 키우며 늘 당당했고 논리적이었다. 그는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1학년 1학기 개강 전에 국제학사에 한 번 방문한 뒤, 졸업할 때까지 김 사무총장의 대학 생활을 들여다보거나 개입하지 않았다. 졸업식도 복잡하다고 그다음 날 학교에 오셔서 같이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제가 힘들 때 돕지 않았어요. 제힘으로 해결하며 자립하길 원하셨죠. 그 대신에 친구들이 가족 역할을 해 줬어요. 어머니는 그래야만 저에게 친구가 생긴다는 점을 터득하고 계셨죠. 오히려 친구들이 저를 돕고 싶어 했는데 제가 도움을 거절했어요. 의학적으로 저는 중증 장애였지만 문제를 독립적으로 해결하는 데 익숙했어요.”


어머니의 신뢰와 지혜를 양분으로 연세에서 동고동락한 기간 동안 특히 고마운 사람은 세브란스병원 재활의학과 박창일 교수다. 장애 학생 입학 허가 당시 재활병원장이었는데 ‘우리가 책임질 테니 뽑으라’며 장애 학생을 지원해 줬다. 김 사무총장은 학교 어디를 가든 자신의 편이 있었다고 한다. 세브란스 재활병원에서 학내 장애 학생들을 전적으로 지지해 준 덕분에 중증 장애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입학 동기들과 함께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에서 일하던 중 신학과 이계준 교수가 손잡아 줬다. 처음으로 동아리 지도 교수를 맡아 줬고 이후에도 계속 이계준 교수의 제자들이 힘 있게 지도 교수를 자임했다. 그는 이런 감사한 스승이 곁에 있어서 장애인 인권 운동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문화인류학과 조한혜정 교수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김 사무총장이 장애 인권 운동을 하는 데 이론적 배경이 돼 준 스승이다. 좋은 동료와 스승을 만날 수 있었던 연세를 그는 ‘사람의 신뢰를 알게 해 준 곳’이라고 추억한다.


“저에게 연세는 ‘사람의 신뢰를 알게 해 준 곳’이에요. 사회 문제를 재밌게 풀 수 있는 경험을 갖게 해 줬고, 글을 쓰면서 세상을 바꾸는 힘을 느끼게 해 줬어요.”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의 시작


일본에서 장애인 지원 체계를 배워 오던 1990년대와 달리 지금은 일본에서 우리 대학교를 탐방해 장애인 지원 체계를 배워 가고 있다. 미국에서도 탐방을 올 정도로 우리 대학교는 발전했고 장애인 졸업생도 늘어 가고 있다. 그는 모교에서 받은 서비스를 모든 학교에 뿌리고 싶어 졸업 후 장애인 인권 운동의 일환으로 장애 학생 대학 진학을 돕는 일에 나섰다.


“졸업한 뒤 ‘일단 대학에 장애 학생이 많이 입학하게 돕자’는 데 뜻을 세웠고 동료들을 모았어요. ‘우리가 대학에 들어갈 때는 정보가 없어 너무 고생했는데, 우리가 힘들게 얻은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달할 방법은 없을까’를 고민했죠.”


그렇게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는 2003년에 공식 출범했다.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대학 내 장애 관련 동아리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입시 상담입니다. 저는 입시 상담을 중점으로 맡고 있어요. 비장애 학생들은 초등학교 6학년만 돼도 부모님들이 무슨 대학에 갈까 찾아보거든요. 그런데 장애인을 자녀로 둔 부모들은 교육보다 치료에 더 관심을 두고 있어서 30년이 넘은 특별 전형 제도의 존재를 몰라요.”


대학에 가고자 하는 장애 학생들의 궁금증을 대학 재학 중인 선배들이 해결해 주고, 회원들 상호 간에 멘토링 매칭도 이뤄진다. 이 모든 입시 컨설팅은 무료로 진행된다. 우리 대학교 출신 장애인들이 모교 교수로 채용되는 미래를 소원하며 장애 학생을 힘닿는 데까지 돕고 싶다는 김 사무총장 덕분에 오늘도 장애 학생들이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사회복지학과 하나의 길만 보지 않길


김 사무총장은 장애 학생의 진로를 상담할 때 자신의 가치가 올라가는 곳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부모들은 자녀의 도전을 불안해한다. 그래서 그는 부모와 먼저 상의한다. 실제로 장애인이면서 자기 꿈을 좇아 과를 선택한 학생들의 삶을 보여 주며 현실적인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도록 설득한다. 김 사무총장은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선후배, 동기들과 함께 지도를 그렸다. 그 지도에는 후배들에게 요긴한 인생 항로가 제시돼 있다.


“장애 학생은 사회복지학과나 특수교육학과 등 인문대에 많이 진학해요. 공부하기 좋고 친절하지만 졸업 후 그들을 뽑아 주는 곳이 거의 없죠. 사회복지학과와 특수교육학과 모두 장애인을 대상으로 서비스하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에요. 장애 학생을 동료로 보기보다 서비스 대상으로 봐요. 저는 영화를 찍고 싶어서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했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무거운 이엔지 카메라로 촬영을 했었는데 어느 날 스마트폰이 등장했죠. 이처럼 미래에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르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며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 돼 보고 죽습니다. 가족 중 장애인은 꼭 발생하죠. 장애인을 보호하는 것은 사회적 투자예요. 출산율을 높이려면 장애 아이도 부담 없이 낳아 키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중도 장애인도 좌절감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대학에 다니며 공부하고, 고용과 연애에서 장애인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야 해요. 현재는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제 우영우 같은 자폐인 역할이 나오고 실제 장애인이 단역으로 나오는 드라마가 뜨기 시작했어요. 장애인도 에버랜드에 가서 푸바오도 같이 보고 여행도 할 수 있는 세계로 막 진입하려고 해요. 아이유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며 대중문화에서도 장애인을 동시대 이웃으로 보기 시작했죠.”


하지만 여전히 OECD 국가 중에 통합 교육을 논쟁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한다. 장애가 심하면 특수 학교로 가라는 말이 버젓이 나오고 있는 현실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분리와 차별이 심해요. 특수 학교에 장애 학생을 몰아넣는 것은 인디언 보호 구역처럼 장애 학생을 가두는 거예요. 가장 심각한 상황이 비장애인은 장애인 친구를 모르고 장애인은 비장애인 친구를 모르는 거예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접점을 늘리기 위해 장애 학생도 통합 교육을 장려받아야 해요. 일상적으로 서로를 마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름을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영화 ‘피터팬’에 나오는 후크 선장도 애꾸눈에 갈고리 손을 갖고 있고, 다리도 한쪽이 없어요. 심한 중증 장애인이죠. 그런데 아무도 그를 장애인 후크라고 부르지 않고 캡틴 후크라고 해요. 장애를 숨기지 않고 당당한 장애인들과 그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회가 오기를 희망해요.”


김 사무총장은 장애인 친구를 만나고,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웃임을 배울 기회가 없는 것이 사회적 불행이라고 강조한다. 장애인과 자연스럽게 함께 살아가는 것은 국가의 가치이자 의무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우리 대학교는 물론 한국 사회의 장애인 인식 개선에 앞장섰던 청춘을 지나, 물심양면으로 장애 학생들을 돕는 현재까지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온 그는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꿈을 크게 가지라고 주문했다.


“장애인으로 살아가며 국내 장애인 문제 해결만 볼 것이 아니라 유엔에 나가 국제 구호 활동도 해 보는 거죠. 우리의 인권 문제 해결에서 더 나아가 세계 인권 문제도 해결하도록 스케일을 크게 가져 보면 좋겠어요. 이익 단체처럼 되지 말고 사회적 소수자들과 함께 싸워 주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앞으로 청년들이 점점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자부심을 품고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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