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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연세뉴스특집] 시인 김수영, 연세 동산의 거대한 뿌리가 되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8-08-30

시인 김수영, 연세 동산의 거대한 뿌리가 되다
8월 학위수여식서 명예졸업장 수여
아내 김현경 여사와의 특별한 만남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올해는 한국문학의 모더니스트이자 대표적인 참여시인으로 꼽히는 김수영 시인(1921~1968)의 서거 50주년을 맞는 해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 덧 반세기가 지났지만 그 누구보다 온몸으로 ‘자유’를 갈망했던 그의 시는 오늘날 보다 푸르른 젊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1921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김수영 시인의 삶은 그가 살아온 시대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1946년 『예술부락』이라는 잡지에 시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한 그는 1950년 결혼 직후 터진 한국 전쟁 당시 남하한 인민군에 의해 강제로 북에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곧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고 만다. 이후 외국문학 번역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시 창작에 매진하여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59년 그의 첫 시집이자 생전에 발간한 유일한 시집인 『달나라의 장난』을 출간했다. 1960년 4.19혁명이 발발한 이후 시인은 현실과 정치를 직시하는 적극적인 태도로 시, 시론, 시평 등을 발표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보였다. 1968년 6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시가 바로 <풀>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페이지 가운데 모호하게 기록되거나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바로 우리 대학교와의 인연이다.

 

파자마 바람으로 체면도 차리고 돈도 벌자고
하다 하다 못해 번역업을 했더니
권말에 붙어나오는 역자 약력에는
한사코 xx 대학 중퇴가 xx 대학 졸업으로 오식(誤植)이 돼 나오니
이렇게 돼서야 고만이지
어떻게든지 체면을 차려 볼 궁리 좀 해야지

 - <파자마 바람으로> 중에서 -

 

그는 시 <파자마 바람으로>에서 자신의 학력을 대학 중퇴라고 밝히고 있는데 바로 이 시에 등장하는 xx 대학이 당시 우리 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다. 우리 대학은 올해 창립 133주년과 시인 서거 50주년을 맞아 동문인 김수영 시인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알려지지 않은 그와 연세대학교의 인연, 나아가 김수영 시인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시인의 아내 김현경 여사를 만났다.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서 만난 김현경 여사는 92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집 곳곳에는 김수영 시인의 시집과 사진, 그림을 비롯해 미술 컬렉터였던 김 여사의 옛 커리어를 방증하듯 다양한 예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1942년 진명여고 2학년이었던 김 여사는 김수영 시인과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나 시대적 풍파 속에서 문학 정신을 나누며 부부의 연을 맺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시를 읽고 생전 집필실을 집에 재현해두는 등 시인의 아내이자 독자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자유로운 학풍에 이끌려 연세대 입학

 

김수영 시인의 명예졸업장 수여 소식을 전해들은 김현경 여사는 “정말 깜짝 놀랐지만 고마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며 소감을 밝혔다.

 

“광복 직후 9월 하순쯤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자대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비롯한 대학에서 신입생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많은 유학생들이 서울대학교로 진학을 했는데 이 양반은 연희전문으로 가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서울대학교는 관료적인 반면 연세대학교는 프리(free)하잖아요. 3학년에 편입을 하신 것 같아요. 한 학기 정도 다니시다가 다시 등록을 해야 하는데 학비를 조달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대학생활에 썩 재미를 못느꼈는지 곧 그만두시더라고요.”

 

 

자유로운 연희전문학교의 학풍이 좋아 연세에서 수학했다는 김수영 시인은 1946~1948년 우리 대학 영문과에 편입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1945년 11월에 입학해 5개월 만에 중퇴했다고 한다. 같은 해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다는 김현경 여사는 마치 꿈꾸는 듯한 눈으로 70여 년 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며 대학 시절 김수영 시인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에는 신촌을 통해 연세대학교에 갈 수 없었어요. 아현동을 거쳐 이화여대 본관 현관을 통해서만 갈 수 있었지요. 마침 제가 공부하던 영문과 건물이 본관 2층이라 학교를 가는 연희대학생들을 볼 수 있었죠. 그때 학우들과 지나가는 학생들의 별명을 지어 부르며 구경하곤 했어요. 김 시인이 그 앞을 지나가면 아이들이 ‘야, 현경아. 너희 아저씨 간다!’ 하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 소리에 창문을 내다보면 벙거지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가방을 맨 채 걸어가는 김수영이 시인이 보였지요. 키도 크고 좀 모양새가 기괴했어요.”

 

학생에서 강의자로, 연세와의 두 번째 인연

 

연세를 떠난 뒤 김수영 시인은 마땅한 곳에 취직하지 않고 출판사 등에서 영문 번역일을 하며 시쓰기에 열중했다. 당시 그의 영어 실력은 매우 탁월했다고 알려졌는데, 덕분인지 1966년 즈음 우리 대학교 영문과 특강을 맡게 됐다.

 

“한 학기를 다니고 중퇴한 이후 단 한 번도 연세대학교에 다녔다고 자랑한 적이 없었는데 당시 특강 신청을 받고 무척이나 좋아하면서 자랑하더라고요.”

 

김현경 여사는 책상 서랍에 고이 간직해 둔 당시 강의 노트를 꺼내 보이며 김 시인이 수업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손때가 묻은 강의 노트에는 정갈한 글씨로 정성을 들여 쓴 영문자들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당시 영국 시인이자 극작가인 T.S.엘리엇(T.S.Eliot)에 대해 강연하셨어요.  시인의 수업이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져서 보통 강의실에서 큰 강의실로, 나중에는 중강당으로 옮겼는데도 학생들이 꽉 찼다고 합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강의 자체가 허술하지 않았어요. 본인이 공부를 철저히 해서 강의를 준비해가는 것도 있지만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더 어필할 수 있을지 톤을 비롯한 언어구사력까지 고민을 했어요. 이 사람이 예전에 연극배우를 지망했던 사람인지라 그런 것들에 천재성이 있었지요. 강의 노트를 만들 때에도 집에 있는 옥스퍼드 사전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국립 도서관에 가서 내용을 다 확인할 정도로 성실했어요. 옆에서 보면서 남편이지만 참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한 사람으로서의 '김수영'

 

시인 김수영은 김현경 여사에게 시인이기 전에 두 아들의 아버지이자 한 사람의 남편이었다. 김 여사는 “교통사고로 이렇게 빨리 돌아가신 게 너무 안타깝다”며, “그때도 잘해드리려 애썼지만 더 잘해드릴 걸, 후회가 남는다”고 그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김 시인은 시시하지 않고 진지한 사람이었어요. 모든 것에 데면데면하지 않았어요. 철저하고 정열이 넘치고 열렬한 사람이었죠. 아들 둘이 있는데 본인이 어린 시절 배우던 천자문 책을 펼쳐놓고 직접 한자를 쓰며 아이들을 가르치곤 했어요. 둘째 아이를 참 예뻐했는데, 둘째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몰래 찾아가 교실 유리창 너머로 수업을 듣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지요. 하루는 선생님이 뒤돌아 판서를 하고 있으니 아이가 뒤에 가서 트위스트 춤을 추더라는 거예요. 열심히 공부하는 것보다 그렇게 엉뚱한 짓을 하는 모습을 보며 신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었어요.”

 

 

남편으로서의 김수영 역시 아내의 마음을 알아주는 섬세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외식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지만 어디에 가더라도 꼭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김 여사는 “어쩌다 집 한 켠에 반 고흐의 그림을 붙여 놓거나, 사이다병에 꽃 한 송이를 꽃아 놓으면 이를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칭찬을 해줬다”며 “내 감성을 구석구석 알아주니 돈을 벌어오지 않아도 살맛이 났다”고 회고했다.

 

김수영 시인의 '시'와 '자유'

 

시인은 시를 쓸 때 원고지에 쓰는 법 없이 잡지 같은 것을 부쳐온 빈 봉투 뒷면에 깨알처럼 까맣게 써 내려갔는데, 그 시를 깨끗하게 옮겨 적는 것은 아내 김현경 여사의 몫이었다고 한다. 시를 쓰고선 항상 아내에게 의견을 물어왔다.


한때 김현경 여사는 늘 “인류를 위해 시를 쓴다”는 김수영 시인이 염려되기도 했다. 김수영 시인은 1할의 부자유도 10할의 부자유를 낳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1퍼센트의 부자유도 없는 완전한 자유를 거듭 강조했고 시에서도 이를 과감하게 표현했다. 그런 시인의 언어를 원고지에 정서하면서 김현경 여사는 시 속의 거침없는 언어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무척이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니 그런 절규가 없었어요. 그 억압의 시대에 다들 조심스러운데 김수영 시인은 발가벗고 시를 썼던 거예요. 참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시는 점점 더 위대해지고 있습니다.”

 

김 여사는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면 풍파를 겪지 않고 평범하게 살았을 테지만 김수영 시인을 만나 나도 많이 깨우치고 인간적으로도 많이 본받았다”며 “같은 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매일이 창작이었던 그는 정말 정직한 사람이었기에 오늘날까지 그의 시가 사랑받을 수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vol.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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