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세소식

[역사 속 연세] 1960년 4.19 혁명과 민주연세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6-03-30

1960년 4.19 혁명과 민주연세

4월에 떨어진 밀알, 故 최정규 열사를 추모하다

 

우리 대학 박물관 2층 학교역사 전시실 앞에는 1960년 4월 19일 시위 과정에서 희생된 고(故 ) 최정규 동문의 부조가 놓여 있다. ‘4월에 떨어진 밀알, 고 최정규 군의 모습’이란 글이 새겨진 그의 흉상이 화석처럼 그날의 함성을 증언하고 있다. 1959년 의예과에 입학한 최정규는 당시 만 열아홉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의 넋은 4월의 붉은 꽃처럼 사그라졌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에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의 불씨로 남아 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운동을 즐기던 평범했던 청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되고 싶어 의대에 진학한 그는 총을 겨누는 경찰들 앞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섰다. 최 열사는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매우 섬세하고 온순한 사람으로 기억되곤 했다. 최 열사와 고교 동문인 안병영 명예교수(전 교육부장관)는 “어머니와 함께 한 4.19”라는 글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데모대가 신촌 로터리로 가는 중간 지점쯤 오른편에 있었던 <하바나> 제과점 옆을 지날 때였다. 마침 고교 동창인 의예과 최정규 군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정규야”하고 크게 소리치며 데모대에 합류하라고 손짓을 했다. 하얗고 앳된 얼굴의 정규는 수줍은 웃음을 띠우며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착하고 여린 친구라 나는 그가 데모대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학교로 갔거니 했다. 그리고 우리는 질풍처럼 돌진했다. 그런데 운명의 신은 너무 가혹했다. 바로 이 최정규가 4.19일, 연세대학교의 유일한 희생자가 될 줄이야.

 

박물관 학교역사 전시실에는 그날의 생생한 현장을 담은 몇 장의 「데모사항조사서」가 전시되어 있다. 당시 정외과 학생들이 역사의 현장을 기록해두기 위해 시위에 참여했던 한 학생의 진술을 받아 옮겨놓은 것이다. 이 조사서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당시 연세 시위대는 대강당 앞에 집결해 행진을 시작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만세삼창을 끝으로 해산한 것으로 추측된다. 진술서를 바탕으로 최정규 열사의 마지막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다.

 

 

4월 19일 정오 대강당앞에 집결한 연세대학교 학생들

 

대강당을 출발한 연세학생시위대

 

스크럼을 짜고 백양로를 통해 나서는 연세학생시위대

 

백양로를 벗어나 진출한 연세학생시위대
 

서소문을 지나 시청앞으로 향하는 연세학생시위대
 

아현동 고개를 넘어 서소문으로 진출하는 연세학생시위대

 

1959년 11월 준공된 대강당에서 4월부터 새로 시작한 채플을 위해 모여든 학생들은 “참다운 민주주의 정치의 구현과 악을 배격하여, 정대한 자유와 정의를 찾고 진리를 찾자”는 결의문을 낭독하고, “깨여라 학도여”, “부정선거 다시 하라”라고 적은 플랑카드를 선두로 시위에 나섰다. 3천여 명의 연세 시위대는 “진리와 자유”, “경찰독재국가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고, “민주주의 반역자를 극형에 처하라”는 전단지를 돌리며 12시 40분경 서대문까지 진출하였고, 시위대로 길이 막힌 광화문로 대신 서울역을 돌아 1시 20분경 시청 앞에 도착하였다. 최정규 동문이 포함된 흰 가운의 의과대학 시위대가 연세 시위대에 합류한 것도 이때였다.

 

연세 시위대는 “부정선거 다시 하자”, “위정자는 양심을 찾으라”는 구호와 통일행진곡 등을 부르며 함께 연좌농성을 한 후, 종로로 진출하여 원남동을 거쳐 중앙청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중앙청 방향에서 사상자가 계속 운반되어 오는 가운데 3시 30분경 마침내 중앙청 앞으로 진출하는 데에 성공하였지만, 선두가 광화문 방면으로 행진 방향을 꺾을 무렵 다시 경찰들이 실탄을 발사하여 선두 학생의 일부가 총탄에 맞고 시위대의 진행이 저지되어 약 30분간 중앙청 앞 도로에서 농성을 하였다. 최정규 동문이 희생되는 순간이었다.

 

「데모사항조사서」 중에서

 

진술자는 이때의 심정을 “나에게 총이라도 있으면, 포탄이라도 있었더라면 저 야만족을 섬멸하고 나도 죽을 것을… 하나님이 이다지도 무심하신가? 나의 형제는 스러지는데, 의롭게 죽는 저들에게 우리 산사람은 어찌 보답하여야 될 것인가?”라고 기록했다.

 

연세 시위대는 사태의 악화와 무자비한 경찰 총탄의 희생이 더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결국 안국동을 돌아 후퇴했다. 울분과 슬픔, 한탄과 원한, 복수심이 불타올랐지만 지성인으로서 질서정연하고 평화로이 행진해 5시경 아현동을 넘어 귀교했다.

 

백양로를 벗어나 진출한 연세학생시위대
 

오후5시 학교로 돌아와 대강당에 집결한 연세학생시위대에 훈화하는 백낙준총장

 

대강당 앞에 다다른 학생들을 맞아 당시 백낙준 총장은 다음과 같이 격려했다.

 

학생들은 통곡과 눈물 속에서 경청했으며 진술자 역시 “우리의 의거는 스승과 제자, 민족과 학생이 이루는 승리의 기록이 되리라.”, “우리는 이 커다란 힘을 꼭 간직하여서 민족과 국민 전체의 자손의 백년대계의 기반으로 삼아야겠다.”는 각오를 갖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세의 아들, 딸들아! 너희들이 나아가서 행동으로 내말을 다하였거늘 내가 이제 무슨 말을 더하랴! 너희들이 올바른 소신을 가졌고 그 소신을 발표한 용기를 가진 것에 나는 자랑스러움을 금치 못한다. 3.1운동 때 여러분의 선배인 김원벽 동문의 혼이 살아서 다시 돌아온 줄로 안다. 너희들이 연세의 전통을 다시 세웠으니 후배에게 영원히 교훈이 될 줄로 믿는다.”

 

한편, 1960년 5월 4일 고 최정규 열사를 기리기 위한 교내 추도예배에서 백낙준 총장은 “과거의 연세는 우리에게 진리와 자유의 정신을 전하여 주었으며, 그로 인해 현재의 연세는 민족정기를 되살아 피게 하는 한 알의 밀알이 된 최군을 낳았고, 이러한 진리와 자유에 의한 숭고한 정신은 미래의 연세를 더욱 빛나게 할 것”이라고 추모했다. 고 최정규 열사에게는 1965년 명예의학사가 수여됐다.

 

학생 시위대가 내달리던 백양로는 지금의 모습과 사뭇 다르고, 평범한 의학도였던 최정규 동문이 길을 나섰던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은 사진 속에서나 찾아볼 따름이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그 붉은 선혈로 나부끼는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던 박두진이나, 연희전문을 중퇴한 김수영의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던 시구 역시 지금은 들려오지 않지만, 그날처럼 잔뜩 흐리고 맵싸한 날이면 청송대로부터 솔바람을 타고 진리와 자유, 민주와 민족의 함성이 금방이라도 울려나올 듯하다.

 

(사진 및 자료 제공 : 박물관)

 

 

 

vol. 596
웹진 PDF 다운로드

연세소식 신청방법

아래 신청서를 작성 후 news@yonsei.ac.kr로 보내주세요
신청서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