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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특별 기고] 언더우드와 교육선교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9-07-01

글 : 민경배(본교 명예교수, 백석대 석좌교수) 언더우드와 한국과는 천생 연분이었다. 1885년 미국을 떠날 때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약혼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나간다는 말에 그 여인은 그의 곁을 떠난다. 그런 형편인데 한국까지 왔다. 그는 병약한 몸이었다. 여러 차례 미국과 스위스에 가서 요양을 하여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을 사랑하고 그리고 한국을 오늘의 한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아주 힘들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1892년 여름 미국에 순회 여행 중 그의 형 존 언더우드가 그에게 미국의 언더우드 타이프라이타 회사의 회장을 맡으라고 권하고, 또 뉴욕 부르클린의 대형교회에서 그를 청빙하기도 하였으며, 유명한 여자대학에서의 총장직도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픈 몸, 병든 아내 그리고 인생 전부, 그것을 바치고 한국에 와서 살다 간 것이다. 그는 1916년 10월 12일에 오랜 투병 끝에 서거한다. 미국의 애틀랜틱 시티에서였다. 그는 마지막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힘을 다해 속삭인다. “나, 나 거기까지 가야하는데.” “어디요, 한국이요?” 그의 아내의 말에 그는 환희 웃고, 그리고 눈을 감았다. 세 살만 더 살았으면 환갑이었을, 57세에 세상을 떠났다. 연세대학교 교정에 있는 언더우드 동상에는 정인보(鄭寅普)의 아름다운 비문(碑文)이 거금 80여 년째 그를 지키고 있다. 거기 이런 말이 있다. 1885년 4월에 25의 장년으로 걸음을 이 땅에 옮겨 33년 동안 선교의 공적이 널리 사방에 퍼지고 학교로는 큰 학교론 연희전문이 이루히니 그럴사 박사 늙으시도다. ... 이렇듯이 연세보다 지나 쇄함을 볼 때 누구든지 고심으로 조선민중의 믿음과 슬기를 돕던 그의 평생을 생각할지로다. ... 뉘 박사의 일생을 57세라 하더뇨. 박사 의연히 여기 계시도다. 그의 동상은 거기가 아닌, 세종로 이순신 맞은편에 서 있어야 한다. 언더우드는 교육에 실로 헌신을 다 하였다. 언더우드는 1886년 2월에 김규식이나 안창호를 배출한 고아원을 학교 형태로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예수학당이 되었다가, 다시 경신학교가 된다. 1912년에는 오늘 평택대학교의 전신인 피어선성경학원도 창설한다. 민족의 거대지도자들이 그에게서 배출된 것이었다. 이승만이 1904년 미국에 갈 때 극찬의 추천서를 써 준 것도 언더우드였다. 하지만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이나 그 영향은 연세대학교(조선기독교대학, 연희전문학교)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이를 감동으로 읽을 수 있다. 언더우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섭렵하고 그 전통에 놀랐다. 그리고는 교육선교의 효율을 직감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1900년 초부터 서울에 대학을 세운다는 꿈을 품어 왔다. 기독교 대학이라는 것은 성서교육만이 아닌 광범위한 교육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언더우드가 연세대학교를 처음 세울 때의 소신이었다. 기독교 대학은 물론 종교를 가르치지만, 상업, 농업, 산업, 기술, 문화, 이런 것들에 걸쳐서 교육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할 때 그는 상학과를 수석학과처럼 내세웠다. 상업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사농공상의 사회 서열 중 그 맨 밑에 오는 천한 직종이었다. 이것을 뒤바꾸어 상학과를 대학 학과의 맨 첫 자리에 올려다 놓은 것이다. 사회적 계층체계를 완전히 뒤엎은 것이다. 사회를 그 뿌리채 흔든 것이다. 한국사회를 변혁하는 힘이 이렇게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것은 혁명이었다. 하지만 힘의 혁명은 아니었다. 교육 백년 천년의 꿈은 35만평에 이르는 신촌 대지에 연희전문학교의 터를 잡은 데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그 위치는 이태조가 원래 서울로 결정하였던 곳이다. 그만큼 명당자리이다. 전략적으로도 이 연희고지는 빼어난 곳이어서 6.25사변 때에는 서울탄환의 요충지로 격전이 거듭되었던 곳이다. 그 옛날 거기 자리를 잡은 것은, 앞을 내다보는 그의 안목이 얼마나 정확하였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연희전문학교가 세워졌을 때에는 그것이 기독교대학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큰 걱정거리였다. 일제는 1915년 3월에 기독교 교육을 위협하는 󰡔개정 사립학교규칙󰡕을 발포하는데, 이 규칙은 기독교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이나 예배를 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일제가 그렇게 한 까닭이 있었다. 한국기독교가 시대적으로 이제 그 제 1세대가 살아져 가는 시대가 온 것이었다. 이제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고 있었다. 그 새로 등장하는 세대를 기독교의 영향권에서 빼내고자 하는, 그런 의도가 있었다. 우리가 지금도 교과서 문제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는 것은, 어린이들의 순백한 마음의 스크린에 일단 씌우진 글들은 일생 지워지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연희전문학교는 인가를 받고 그리고 기독교 정체성이 보장되는, 그런 출발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묘한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총독부의 내무국장(내무장관격)은 우사미(宇佐美勝夫)라는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이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신설 대학에 성서학과를 설치하여서, 그 학과의 강의를 전체 학생이 선택하는 형식으로 수강하면 종교교육과 채플의 이행이 가능하다는, 그런 지략을 준 것이었다. 이것은 탁월한 묘안이었다. 총독부 안에도 그런 인물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되고 기독교 법인으로 인가를 받은 것이다. 1917년 4월 7일 조선총독부는 “연희전문학교 기독교연합재단법인”을 인가한 것이다. 창설자 언더우드가 별세하고 나서 반년 후의 일이었다. 언더우드의 인내와 신앙이 엮어낸 축복의 한 장(章)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의 흔적은 사실 한국근대화의 도처 여기저기 빛나고 있다. 그가 시작하지 아니한 근대화의 작업은 하나도 없다. 그런 인물이 연세대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학교가 21세기 세계를 주도하는 한국의 강력한 리더들을 배출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 현재 연세대학교의 동문 수는 231,839명, 부속교육기관 동문 수 208,647명, 그래서 총계 440,486명이 국내와 세계에서 약진하고 있다.

 

vol.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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