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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연세 뉴스] “조국독립을 꿈꾸던 연희캠퍼스의 발전에 가슴이 뜁니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8-10-16

항일결사 ‘조선학생동지회’ 독립유공 원로동문 모교 방문 윤주연, 김영하, 문수완 동문 “학문연마와 조국독립을 위해 열정을 불태웠던 연세의 교정. 70년 만에 그때의 동지들과 함께 다시 둘러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백배, 천배 발전한 연세대학교가 자랑스럽습니다.” 일제의 폭압이 극한에 달했던 일제말기 항일결사 조선학생동지회를 조직해 민족의 독립을 도모했던 자랑스러운 윤주연(연희전문 상학 38년 입학), 김영하(상학 39년 입학) 동문과 문수완 동문(상학 39년 입학)이 함께 10월 7일 모교를 방문했다. 이십대의 젊음을 독립투쟁에 바치고 아흔이 넘은 노익장의 모습으로 캠퍼스를 다시 찾은 이들은 감탄에 감탄을 더하며 모교의 발전에 남다른 기쁨을 표했다. 박물관과 기록보존소의 초청으로 모인 세 명의 원로동문들은 일제의 가혹한 사상적인 탄압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민족정신을 지켜왔던 우리대학교의 옛 이야기들을 조선학생동지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세 시간 동안 들려줬다. “일제 강점기에 연희전문학교는 마치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 조계 같은 곳이었어요. 연희전문에 들어가면 일본인들이 함부로 조선인을 잡지도 못하는 분위기였죠.” 중동중학교(현재 중동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항일정신을 키워오던 윤주연 동문은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항일결사를 구상했다고 한다. 조선학생동지회는 1939년 연희전문학교(우리대학교의 전신)에 재학 중이던 윤주연을 대표로 동교생인 김상흠, 서영원, 김영하, 김재황, 이동원, 민영로가 중심으로 만든 항일결사 조직이다. 조선학생동지회는 3·1독립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하기로 하고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그 동안에 이들은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시키기로 하고 동경유학생 등 해외유학생과도 연락을 맺어 거국적인 거사를 계획했다. 이들은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우리대학교 뒷산, 남한산성, 냉천동 약수터, 벽제관 등 각지에서 여러차례 모임을 갖고 독립의식을 기르는 한편 동지규합 및 조직 확대에 힘을 쏟았다. “조선학생동지회는 1942년 거사를 준비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말 사용하기, 창씨개명에 대한 반대, 황국신민서사 반대, 우리역사 읽기 등 나름 민족정신 유지계승을 위한 노력도 했습니다. 일제의 감시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활동이 매우 힘들었어요. 일제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등산을 하는 것처럼 뒷산에 오르거나 약수터에 모여 몰래 회합을 가졌고 그 어떤 문서도 남기지 않도록 하는 등 각별히 보안에 신경을 썼지요.” 그런데 1941년 7월에 동회의 하부조직인 원산상업학교의 이근갑씨가 열차 안에서 우리역사책을 읽다가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동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연희전문학교 조선학생동지회 중심 조직원들은 1941년 9월에 일경에 피체되어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이날 대담의 진행을 맡았던 나일성 명예교수(이과대학)는 “당시는 내어놓고 독립을 말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제의 완전통제 하에 있던 시절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도 독립투쟁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노력이 큰 의의를 갖는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대담에 앞서 김영하, 윤주연 동문은 재학시절 사진을 비롯한 여러 점의 학교사 자료를 우리대학교에 기증했다.

 

vol. 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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